권위의 상징 '구령대'가 트리하우스 놀이터로 파격 변신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4.01.19. 15:30

수정일 2024.01.19. 16:21

조회 2,855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타이틀 이미지
하얀 눈이 덮인 풍경 속에서 활발하게 뛰어노는 아이들.
하얀 눈이 덮인 풍경 속에서 활발하게 뛰어노는 아이들.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20) 다음세대 놀이터 짓기

어른들은 추워서 움츠러들곤 하지만 어린이들은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눈이 덮인 풍경은 몸이 따라주지 않는 어른들도 교통 걱정, 물가 걱정을 잠시 잊고 싱숭생숭 마음이 들뜨게 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그에 더해 몸으로 반응하고 싶은 에너지가 더 커진다. 단지 혼자서만 뛰어노는 것만이 아니다. 하얀 눈이 덮인 풍경 속에서 친구를 만나고 서로 돕기도 하며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억의 자양분으로 남는 활동이다. 협업과 창의성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눈이 덮인 들판에서도 아이들은 즐겁다. 아이들의 놀이는 이를 촉진시킬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된 공간을 통해서 더욱 발전된다. 그 설계의 과정에 진정한 주인공인 어린이들이 참여하여 건축가와 같이 상상을 발전시키고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설계에 참여한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놀이풍경이 될 수 있다. 
어린이들은 공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놀이 공간을 만든다.
어린이들은 공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놀이 공간을 만든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디자인을 가진 구령대 놀이풍경.
전 세계에서 유일한 디자인을 가진 구령대 놀이풍경.
어린시절 놀이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뭇가지, 돌멩이 등으로 기지를 만들고 놀이규칙을 만든다.
그 기억들이 남아있는 건 
그것들을 스스로 직접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공간과 놀이를 창작하는 어린이들

어렸을 때 잘 놀았던 추억은 시간이 지나가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동네 골목길에서 시장 옆 공터에서, 공사장 한 귀퉁이에서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 돌멩이, 벽돌 등을 모아서 친구들과 기지를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놀이 규칙을 만들어가며 놀지 않는가. 그 기억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을 스스로 직접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환경이, 그 물건들이 실제 재료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놀이의 여정 놀이풍경

국제 아동 구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은 매해 몇 군데의 초등학교를 선정하여 ‘놀이터를 지켜라’라는 주제로 놀이공간을 지어주어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회복하는 사업을 꽤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건축가이지만 여러 해 동안 어린이 공간에 대한 탐구와 경험을 감안하여 서울 동대문구 동답초등학교에 놀이공간을 디자인하는 설계자로 필자의 EUS+건축이 선정되었다.
어느 학교에나 아직도 남아있고 관습적으로 지어지고 있는 구령대 혹은 조회대.
어느 학교에나 아직도 남아있고 관습적으로 지어지고 있는 구령대 혹은 조회대.

전국의 학교 운동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구령대’를 대상지로 정하여 그것을 위계적이고 일방향적인 성격의 공간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어린이들의 놀이와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구조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요즘엔 전교생을 모아놓고 하는 조회 같은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구령대는 운동기구들을 넣어두는 창고 역할만 하고 있었다. 놀이공간에 어떤 것이 있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키즈카페나 전형적인 놀이터를 떠올리며 트램펄린·볼풀·미끄럼틀·시소 등을 원한다고 했다. 
구령대의 흔적을 남기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더한 리모델링 개념의 새 놀이풍경.
구령대의 흔적을 남기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더한 리모델링 개념의 새 놀이풍경.

그러나 건축가는 특정 활동만 할 수 있게 용도가 정해진 시설보다는 진짜 건축물처럼 그에 맞는 재료로 창문·계단·벽·기둥·바닥 등 기본적인 건축구조를 세심하게 설계하면 충분히 더 창의적이고 재미있게 놀 수 있다고 믿었다. 시소 없이 오르내릴 수 있고, 트램펄린 없이 뛸 수 있고, 철봉 없이 매달리고, 암벽타기 없이 기어 올라가고, 미끄럼틀 없이 미끄러지는 방법을 생각해 내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이 작은 놀이풍경에도 위 아래 입체적인 많은 공간들이 있고 어린이들은 그 공간을 나름의 방법으로 즐길 줄 안다.
이 작은 놀이풍경에도 위 아래 입체적인 많은 공간들이 있고 어린이들은 그 공간을 나름의 방법으로 즐길 줄 안다.

처음엔 놀이시설로 가득 찬 놀이터 모형을 만들었던 아이들은 건축가들의 얘기를 듣고 벽·기둥 같은 건축적 기본 요소로 만들어진 놀이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과 아이들의 아이디어가 합쳐지면서 아무도 이용하지 않던 구령대는 경사대·계단·트리하우스 등을 갖춘 입체적 구조물로 다시 탄생했다. 재료는 철제프레임·나무·그물 등을 사용했다. 
집이나 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공간의 입체성과 경사면 등도 놀이의 환경이 될 수 있다.
집이나 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공간의 입체성과 경사면 등도 놀이의 환경이 될 수 있다.
이층집 다락과 같은 플레이하우스.
이층집 다락과 같은 플레이하우스.

기존 구령대 단상의 높이가 단층 공간만 경험하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복층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놀이터의 토대가 되었다. 구령대 위에 다락방 같은 트리하우스를 하나 더 올리고 진입 동선을 층층이 다양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옛 구령대를 넘나들며 트리하우스를 향해 계단과 경사로를 자유롭게 오른다. 아이들은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술래잡기’ 등 새로운 규칙을 공간에 맞게 추가해 놀이를 창작했다.  

놀이공간이지만 전형적인 놀이기구 하나 없이 추상적인 공간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아이들이 더욱 창의적으로 놀이를 할 수 있게 하였고, 기존 운동장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오르면서 다양한 놀이를 통하여 가장 높은 공간인 ‘놀이집’에 올라 운동장을 바라볼 수 있고 친구들과 아늑한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다시 계단을 통해 내려오며 기존 구령대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체험과 놀이를 한다는 점에서 ‘놀이의 여정’이라는 프로젝트 제목이 붙여졌고 어린이들은 ‘놀이놀이팡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이 특별한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놀이를 창작해낸다.
어린이들은 이 특별한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놀이를 창작해낸다.

작은 예산과 작은 구조물이지만 아이들이 직접 디자인 과정에 참여를 할 수 있었고 더욱 애정을 갖고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새로운 모델로서의 놀이터 공간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놀이터 설계’는 건축가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물리적 놀이터 환경 자체만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어른들,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가 또 다른 다음세대 놀이터 짓기의 중요한 건축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이곳은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구령대였지만 지금은 어린이들의 상징인 놀이풍경이 되었다.
이곳은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구령대였지만 지금은 어린이들의 상징인 놀이풍경이 되었다.

어린이 참여디자인 워크을 통한 놀이풍경 상상

EUS+건축은 동답초등학교 학생들 30여명과 총 4회의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하였고 그것을 통하여 어린이들의 희망을 파악하고 직접 아이들이 자신들의 놀이공간을 구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건축가의 지혜와 아이들의 희망에 대한 공감을 통해 최종 놀이공간을 디자인했다. 
학교 학생들이 구령대가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는지를 표현했다.
학교 학생들이 구령대가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는지를 표현했다.
어린이들과 구령대에서 그들이 만든 상상안을 같이 이야기 나눴다.
어린이들과 구령대에서 그들이 만든 상상안을 같이 이야기 나눴다.
디자인 워크을 통해 어린이들이 만든 모형 중 하나 (왼쪽)과 EUS+건축가들이 발전시킨 모형 (오른쪽).
디자인 워크숍을 통해 어린이들이 만든 모형 중 하나 (왼쪽)과 EUS+건축가들이 발전시킨 모형 (오른쪽).
놀이터를 짓는 원칙 중 하나는 
나무는 나무답게, 철은 철답게 
재료의 물성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재료, 가짜 재료

필자를 포함한한 EUS+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놀이터를 짓는 원칙 중 하나는 “나무는 나무답게, 철은 철답게 재료의 물성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명확하고 진실한 표현일수록 아이들이 이해하고 조심하며 자신의 힘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세상을 배우고 놀이기구 또한 세상의 일부다. 놀이기구와 놀이터에서 힘이 전달되는 과정을 관찰하고 구조물이 구축된 방식을 잠재적으로 건강하게 깨닫는다. 그래야 어른이 된 후 세상의 보이지 않는 힘에 대처하는 상식을 키울 수 있다고 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그러나 지금의 어린이 놀이터들은 관리와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여전히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재료들 일색이다. 그것도 돌인 척하는, 나무판인 척하는 플라스틱들 말이다. 나는 이런 것을 ‘가짜 재료’라고 부른다. 어린이들이 따뜻한 재료는 따뜻하게, 무른 재료는 무르게, 단단한 재료는 단단하게 느낄 수 없이 형태만 성형해 놓은 가짜 재료의 놀이터에서 놀이를 하더라도 무엇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까. 
진짜 재료가 쓰인 왼쪽 놀이터와 가짜 재료로 만들어진 오른쪽 놀이터.
진짜 재료가 쓰인 왼쪽 놀이터와 가짜 재료로 만들어진 오른쪽 놀이터.

2017년 미국 보스턴 인근의 작은 마을에 오래되어 낡은 놀이터를 새로 설치할 일이 생겼다. 기존처럼 그네, 시소, 미끄럼틀을 새로 사다 놓자는 주민들 의견에 이 동네의 한 주민이자 건축가인 브랜든(Brandon)은 자신이 특별한 놀이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그대로 지었다.  

동네 주민들의 열열한 지지는 물론이거니와 동네 아이들의 특별한 놀이 경험이 시작되었고 이 해의 많은 소규모 건축상을 받기도 했다. 필자가 방문해서 본 이 놀이터, ‘파이브필드 놀이구조물’은 목재로 지어져 지역과도 잘 어울리고 아이들과 공간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독특한 곳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다음세대를 위한 놀이풍경 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의 ‘놀이의 여정’ 놀이풍경도 그 중심에 있다.  
목재만으로 추상적인 그러나 즐거운 놀이터를 만든 파이브필드 놀이구조물과 그 건축가 브랜든과 필자.
목재만으로 추상적인 그러나 즐거운 놀이터를 만든 파이브필드 놀이구조물과 그 건축가 브랜든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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