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아닌 손끝으로 보는 세상, 그곳의 랜드마크를 상상하다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3.12.15. 15:41

수정일 2023.12.15. 17:29

조회 1,587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많은 건축들과 랜드마크들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많은 건축물과 랜드마크들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고 배우고 활동하고 즐기기 위해 많은 건축물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건축물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랜드마크’(landmark)라 부른다. 

피라미드, 에펠탑, 피사의사탑, 빅벤, 타지마할, 자유의여신상, 도쿄타워, 남대문 등 대부분 지상 보다 높은 곳에 큰 규모로 세워져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나 브루주칼리파 같은 초고층 빌딩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초고층빌딩의 원조인 마천루라는 단어는 하도 높아서 ‘하늘을 긁는 것 같다’는 의미로 ‘skyscraper’라고 표기해 왔다.   
세계의 수많은 랜드마크들
세계의 수많은 랜드마크들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한 랜드마크

그렇다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가상의 나라를 상상해 보자.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의 랜드마크는 어떨까? 보이지 않는데 시각적으로 높거나 거대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안 보이는 이들이 사는 나라의 랜드마크로 ‘열린 풍경’(openscape, 이하 오픈스케이프)를 제안한다. 이곳은 서로 모이는 광장(plaza)이면서, 놀이풍경(playscape)이고, 다양한 공공(public)의 활동이 벌어지는 장(field)이기도 하다.

이 나라의 랜드마크는 욕망을 가득 담아 서로 경쟁하기 위해 높이 솟을 필요가 없다. 요란한 형태와 값비싼 재료, 조명도 필요 없다. 서로 간의 경쟁 없이 모일 수 있는 ‘열린 풍경’, 그것이 진정으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이 나라의 랜드마크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가상의 나라가 있다면 랜드마크가 어떤 의미일까.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가상의 나라가 있다면 랜드마크가 어떤 의미일까.
아늑하게 땅으로 파고들어간 랜드마크.
아늑하게 땅으로 파고들어간 랜드마크.

손끝의 촉감으로 걷다

이 오픈스케이프에 오기 위해서는 거주하는 곳에서 길을 나서야 한다. 어느 도시보다 촘촘하게 심어져 있는 가로수를 손으로 스쳐가며 걸어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엔가 그 나무들은 벽으로 바뀌어 있다. 

어떤 벽은 예전의 화석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트래버틴(travertine) 벽이고, 어떤 벽은 금속 벽이, 또는 코르크 벽이 오픈스케이프까지 이어져 있다. 벽 사이사이에 물을 마실 수 있는 곳도, 잠시 걸터앉을 수 있는 벤치도 통합되어 있다. 길을 걷다 만난 이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촉감이 시각 못지않은 길 유도 감각이 되려면?
촉감이 시각 못지않은 길 유도 감각이 되려면?

벽을 따라 걷다 보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완만한 경사를 느끼게 된다. 여기부터 본격적인 오픈스케이프의 시작이다. 더 걷다 보면 벽의 그림자가 더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벽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땅이 낮아지는 것이다. 다시 평지로 되는 순간 손끝으로 느끼며 걸었던 벽도 끝이 난다. 

이곳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로 앉아있기도 하고 서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음악 공연을 즐기기도 한다. 그 오픈스케이프의 머리 위에서는 꽃 향이 난다. 매달려 자라는 식물들로 그늘이 드리워진다.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오픈스케이프까지 가는 여정의 다이어그램.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오픈스케이프까지 가는 여정의 다이어그램.

어떤 경우라도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교류해야 한다

이런 열린 풍경은 도시 곳곳에 위치한다. 조금 크고 깊고, 조금 작고 낮고, 그런 다양한 크기와 비율로 시민들의 다양한 공공 활동을 담을 수 있게 배치된다. 그리고 거주 도시와 자연스럽게 벽으로 연결된다. 바닥의 재질도 단단한 돌로 되어 있는 것, 따뜻한 나무로 되어 있는 것, 울퉁불퉁한 벽돌, 폭신한 잔디로 되어 있는 것 등 다양한 재질이어서 내가 어느 오픈스케이프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방에서 중심으로 모인 벽들 사이사이는 경사로로 비워져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열린 풍경에서 걷고, 만나고, 이야기한다. 
땅 아래로 완만하고 아늑하게 파진 오픈스케이프로 벽을 손끝으로 느껴가며 모인 사람들이 서로 직접 소통하고 자연을 느끼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땅 아래로 완만하고 아늑하게 파진 오픈스케이프로 벽을 손끝으로 느껴가며 모인 사람들이 서로 직접 소통하고 자연을 느끼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나라의 광장

장애예술 매니페스토

갑자기 ‘보이지 않는 나라’라고 하니 의아하셨을 수도 있다. 위 내용은 얼마 전 있었던 2023 모두예술주간 ‘장애예술 매니페스토’ 행사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장애예술 매니페스토’는 장애를 가진 분들의 예술 활동과 경험, 그리고 포용적인 사회를 위해 기획되었다. 필자는 그 중 ‘보이지 않는 나라를 디자인하기’ 워크숍에 참여했다.
장애예술 매니페스토 홈페이지 이미지.
장애예술 매니페스토 누리집 이미지.

도쿄공업대학 미래인류연구센터 디렉터인 ‘이토아사’(Ito Asa)씨가 발제하여 진행한 ‘보이지 않는 나라를 디자인하기’ 워크숍은 건축가인 필자를 포함하여 요리사, 법률가, 정치가, 교육자, 예술가 등 여섯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만약 완전히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만 사는 나라가 있다면 그 사회는 어떨까?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요리를 먹고, 어떤 상징을 갖고, 법은 어떻고, 의사소통의 수단은 어떻게 되며, 예술과 교육은 어떨지 등에 대해 그룹별 토론이 진행됐으며, 그 내용을 종합 정리하여 발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보이지 않는 나라를 디자인하기’ 워크샵의 기획 진행자, 이토 아사.
‘보이지 않는 나라를 디자인하기’ 워크샵의 기획 진행자, 이토 아사.

필자가 속한 그룹에선 배가영(교사), 박우진(출판 편집자), 윤민지(조형예술 대학생), 정을미(시각장애 공연예술가) 선생님이 함께하며 놀라운 상상력과 관찰력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간 경험과 생각들을 나눠 주었다. 필자는 그것을 종합하여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번 작업은 단지 배려의 수준을 넘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나라 디자인하기의 건축분야 발표 장면.
보이지 않는 나라 디자인하기의 건축분야 발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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