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월대' 발굴에 얽힌 흥미진진한 고고학 이야기!
발행일 2023.03.23. 14:20
1990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은 2045년까지 장장 55년 동안 이루어지는 긴 역사의 여정이다. 현재 광화문 앞은 경복궁 중심축의 완성이라 할 월대 복원을 위한 사전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발굴조사 현장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의견을 청취하는 행사가 지난 3월 16일~18일까지 열렸다. ☞[관련기사] 광화문 앞 전차철로 발굴 현장 공개…8일부터 선착순 접수
기자도 운 좋게 프로그램 신청에 성공해 발굴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광화문 육조마당의 운영부스에서 간단한 사전 안내를 듣고 배포물을 수령한 후 삼군부터, 월대터, 의정부터 순으로 현장을 살펴보았다.
프로그램 진행은 서울시립대 국사학과의 신희권 교수가 맡아 자세한 해설을 해 주었다. 조선 초 경복궁과 육조대로의 완성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으로 임진왜란 후의 상황, 그리고 고종 시기의 경복궁 중건, 일제강점기 동안의 훼손, 현대에 이루어진 광화문 복원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흥미진진한 고고학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다시 풀어보려 한다. 이하의 내용은 신희권 교수의 해설을 바탕으로, 기자가 여러 가지 자료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더해 종합한 것임을 밝힌다.
기자도 운 좋게 프로그램 신청에 성공해 발굴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광화문 육조마당의 운영부스에서 간단한 사전 안내를 듣고 배포물을 수령한 후 삼군부터, 월대터, 의정부터 순으로 현장을 살펴보았다.
프로그램 진행은 서울시립대 국사학과의 신희권 교수가 맡아 자세한 해설을 해 주었다. 조선 초 경복궁과 육조대로의 완성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으로 임진왜란 후의 상황, 그리고 고종 시기의 경복궁 중건, 일제강점기 동안의 훼손, 현대에 이루어진 광화문 복원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흥미진진한 고고학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다시 풀어보려 한다. 이하의 내용은 신희권 교수의 해설을 바탕으로, 기자가 여러 가지 자료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더해 종합한 것임을 밝힌다.
광화문 역사광장 내 발굴조사 현장 시민공개 및 해설 프로그램인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의 운영부스에서 간단한 사전 안내를 듣고 배포물을 수령한 후 발굴 현장으로 출발했다. ⓒ이정규
육조대로, 의정부와 삼군부
조선 건국 초기에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육조대로는 중국 주나라의 국가례를 다룬 유교경전인 ‘주례’에 따라 그 배치가 이루어졌다. ‘좌묘우사’ 원칙에 따라 임금이 있는 경복궁의 좌측에 종묘를 지었고, 우측에는 사직단을 지었다. ‘전조후시’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앞쪽에 육조 관청을 지어 육조대로가 형성되었다. 폭이 50m가 넘었던 육조대로는 왕도의 중심 대로이자 경복궁과 함께 왕도의 상징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임금과 신하의 시각에 따라 육조대로를 부르는 명칭이 달랐다는 것이다. 왕의 시각이 중심이 되는 실록에서는 광화문 앞에 있는 길이라는 의미로 광화문전로, 경복궁전로 등으로 불렸지만, <승정원일기>에서는 신하의 입장에서 육조대로, 육조대가, 육조가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경복궁과 육조 관청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되고 만다. 광해군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의 재건을 택했으나 육조 관청은 창덕궁 앞이 아닌 육조대로에 새로이 지었다. 그 후 27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은 고종 시기인 1865년부터 중건이 시작되어 1868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된다.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7,400여 칸인데, 중국의 자금성이 9,800여 칸임을 비교한다면 그 규모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무렵 왕권강화를 위해 의정부의 위상을 복원하고 삼군부를 부활시키면서 관청을 정비하였는데, 의정부는 육조대로의 동쪽 편 제일 앞쪽에, 삼군부는 서쪽 편 제일 앞쪽에 자리하여 문무의 균형을 보여준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보게 되는 발굴터는 의정부와 삼군부 건물의 외행랑이 위치했던 곳이며, 의정부 본 건물터는 2016~2019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삼군부의 본 건물터는 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다.
재미있는 사실은 임금과 신하의 시각에 따라 육조대로를 부르는 명칭이 달랐다는 것이다. 왕의 시각이 중심이 되는 실록에서는 광화문 앞에 있는 길이라는 의미로 광화문전로, 경복궁전로 등으로 불렸지만, <승정원일기>에서는 신하의 입장에서 육조대로, 육조대가, 육조가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경복궁과 육조 관청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되고 만다. 광해군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의 재건을 택했으나 육조 관청은 창덕궁 앞이 아닌 육조대로에 새로이 지었다. 그 후 27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은 고종 시기인 1865년부터 중건이 시작되어 1868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된다.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7,400여 칸인데, 중국의 자금성이 9,800여 칸임을 비교한다면 그 규모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무렵 왕권강화를 위해 의정부의 위상을 복원하고 삼군부를 부활시키면서 관청을 정비하였는데, 의정부는 육조대로의 동쪽 편 제일 앞쪽에, 삼군부는 서쪽 편 제일 앞쪽에 자리하여 문무의 균형을 보여준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보게 되는 발굴터는 의정부와 삼군부 건물의 외행랑이 위치했던 곳이며, 의정부 본 건물터는 2016~2019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삼군부의 본 건물터는 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다.
배포물로는 해설 수신기, 리플릿, 생수와 간식, 조끼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정규
광화문 앞쪽에 발굴조사를 위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이정규
광화문 월대
광화문 앞에 설치되었던 월대(月臺)는 임금과 백성이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월대는 이름에서 보듯 '달을 바라보는 기단 형식의 대'라는 소박한 뜻에서 출발하지만, 광화문 월대는 왕과 백성이 만나는 행사를 열었던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난간석이 둘러져 있는 월대는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 앞 단 두 곳 뿐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광화문 월대가 있었는지 여부는 문헌상으로 확실치 않으나, 세종 때 한 신하가 월대의 조성을 건의했다는 기사가 실록에 전한다. 예법과 궁궐의 위신을 위해 광화문 월대를 만들자고 예조판서가 건의했으나 세종은 농사철에 접어들었음을 지적하며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광화문 월대는 경복궁 중건 시기인 1866년에 조성된 것이다. 월대의 전체 규모는 길이 48.7m, 너비 29.7m이고 가운데에 7m 폭의 어도가 있었으며, 둘레에는 난간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광화문 월대가 있었는지 여부는 문헌상으로 확실치 않으나, 세종 때 한 신하가 월대의 조성을 건의했다는 기사가 실록에 전한다. 예법과 궁궐의 위신을 위해 광화문 월대를 만들자고 예조판서가 건의했으나 세종은 농사철에 접어들었음을 지적하며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광화문 월대는 경복궁 중건 시기인 1866년에 조성된 것이다. 월대의 전체 규모는 길이 48.7m, 너비 29.7m이고 가운데에 7m 폭의 어도가 있었으며, 둘레에는 난간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프로그램에서 둘러본 발굴현장은 삼군부 영역 발굴터, 월대 발굴터, 의정부 영역 발굴터 총 세 곳이다. ⓒ이정규
광화문 월대의 훼철
광화문 월대의 훼철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전차의 노선이 부설되면서 벌어진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한 서울의 전차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그 노선이 대폭 늘어나게 된다. 1917년에 종로와 광화문을 연결하는 광화문선이 개통되었고, 1923년에는 각각 통의동 노선과 안국동 노선이 광화문 앞을 지나가게 된다. 즉, 광화문 앞에서 전차 노선이 Y자 모양으로 갈라져 통의동선과 안국동선으로 진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화문 월대는 1923~24년 무렵에 훼철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안국동선은 지금의 송현동 부지에 있었던 조선식산은행의 사택단지 거주자들을 위한 출퇴근용으로 건설되었고, 통의동선은 1923년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던 조선부업품공진회의 출구가 경복궁 서쪽의 영추문으로 결정되면서 이를 위해 신설되었다. 통의동선은 해당 방면에 조선총독부 관사와 숙사, 동양척식회사 사택 등이 있어 식민통치기구 관리와 근무자들의 출퇴근 편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내에 지어지면서 광화문은 이듬해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건춘문의 북쪽 편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500년 왕도를 상징하던 광화문과 그 월대는 일제에 의해 상징적 혹은 물리적 최후를 맞게 된다. 광화문 월대의 훼철을 가져왔던 전차의 해당 노선(통의동선)은 1966년에 세종로 지하도 공사로 운행을 중지했다가 철로 채 그대로 도로포장 아래에 묻히게 된다. 이 철로가 바로 이번 발굴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의 전차 운행은 1968년에 전면 폐지됐다.
안국동선은 지금의 송현동 부지에 있었던 조선식산은행의 사택단지 거주자들을 위한 출퇴근용으로 건설되었고, 통의동선은 1923년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던 조선부업품공진회의 출구가 경복궁 서쪽의 영추문으로 결정되면서 이를 위해 신설되었다. 통의동선은 해당 방면에 조선총독부 관사와 숙사, 동양척식회사 사택 등이 있어 식민통치기구 관리와 근무자들의 출퇴근 편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내에 지어지면서 광화문은 이듬해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건춘문의 북쪽 편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500년 왕도를 상징하던 광화문과 그 월대는 일제에 의해 상징적 혹은 물리적 최후를 맞게 된다. 광화문 월대의 훼철을 가져왔던 전차의 해당 노선(통의동선)은 1966년에 세종로 지하도 공사로 운행을 중지했다가 철로 채 그대로 도로포장 아래에 묻히게 된다. 이 철로가 바로 이번 발굴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의 전차 운행은 1968년에 전면 폐지됐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육조대로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2022년 촬영), 이번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주요 유구의 현황을 사진에 표시해 보았다. ⓒ이정규
삼군부 영역 발굴현장의 모습. 이곳에서는 고종 시기 삼군부의 외행랑과 추정 내행랑, 건물지, 배수로 등이 발굴됐다. ⓒ이정규
1923년에 개통된 통의동선의 전차 철로도 그 모습 그대로 발굴됐다. ⓒ이정규
광화문 월대의 복원
일제가 옮겼던 자리에 있던 광화문은 한국전쟁 때 목조 문루는 파괴되고 석축만 남아 있다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당시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으로 이전 복원된다. 하지만 문루를 콘크리트로 복원했고, 중심축을 중앙청에 맞춤으로써 경복궁의 중심축과 어긋났을 뿐 아니라 위치 또한 원래의 위치보다 뒤로 물러난 곳이었다.
이렇듯 불완전하게 이전, 복원된 광화문은 1990년에 경복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2006년에 철거되고, 원래 광화문의 모습을 찾기 위한 발굴조사가 2007년에 이루어졌다. 이때 고종 시기에 지어진 광화문 월대의 유구 일부가 확인된 것이다. 또한 광화문 월대 난간석 1기가 경복궁 내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발견되었다(건청궁과 녹산은 을미사변의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난간석은 현재 일부 복원이 이루어진 월대 난간의 부재로 사용되고 있다. 다행인 것은, 광화문 월대 훼철 이후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월대 난간석의 상당수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한쪽에 놓여 있는 것이 최근에 확인되어 광화문 월대 복원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10년에 완공된 것이다. 이때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광화문 월대가 마침내 올해 복원이 완료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에 앞서 2022년 9월부터 광화문 월대 및 그 주변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기자가 프로그램 참여로 둘러본 곳이 바로 이 발굴조사 현장이다.
광화문 월대의 복원은 광화문-흥례문-근정전-침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 중심축 복원의 마침표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부디 시민과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 유구 보존과 월대 복원이 원활히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렇듯 불완전하게 이전, 복원된 광화문은 1990년에 경복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2006년에 철거되고, 원래 광화문의 모습을 찾기 위한 발굴조사가 2007년에 이루어졌다. 이때 고종 시기에 지어진 광화문 월대의 유구 일부가 확인된 것이다. 또한 광화문 월대 난간석 1기가 경복궁 내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발견되었다(건청궁과 녹산은 을미사변의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난간석은 현재 일부 복원이 이루어진 월대 난간의 부재로 사용되고 있다. 다행인 것은, 광화문 월대 훼철 이후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월대 난간석의 상당수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한쪽에 놓여 있는 것이 최근에 확인되어 광화문 월대 복원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10년에 완공된 것이다. 이때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광화문 월대가 마침내 올해 복원이 완료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에 앞서 2022년 9월부터 광화문 월대 및 그 주변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기자가 프로그램 참여로 둘러본 곳이 바로 이 발굴조사 현장이다.
광화문 월대의 복원은 광화문-흥례문-근정전-침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 중심축 복원의 마침표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부디 시민과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 유구 보존과 월대 복원이 원활히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초석(주춧돌) 아래에 다시 작은 돌과 모래를 층층이 쌓아 땅을 단단히 하는데, 이것을 적심이라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바로 적심이며 오랜 시간이 지나 지상의 건축물이 사라져도 남아 있는 적심을 보고 해당 건물의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추정한다. ⓒ이정규
삼군부의 동서 방향 외행랑의 기초를 이루었던 적심 ⓒ이정규
삼군부의 남북 방향 외행랑의 적심 ⓒ이정규
삼군부 영역에서는 추정 내행랑과 여러 건물지도 발굴되었다. ⓒ이정규
남북 방향 외행랑 바깥쪽에서는 배수로도 발굴되었다. 위쪽 배수로는 원형 그대로인데 비해 아래쪽 배수로는 일제강점기에 기존 것을 콘크리트로 고쳐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정규
삼군부 영역의 외행랑터는 전차 철로 아래 70cm 깊이에서 발굴되었다. 신희권 교수의 해설에 따르면, 서울시내에서는 100년에 평균 50cm씩 지층이 쌓여 조선 전기의 지층은 지하 3m 지점에서 발굴된다고 한다. ⓒ이정규
월대 발굴 영역에서는 광화문 월대의 기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정규
광화문 월대의 전체 규모는 길이 48.7m, 너비 29.7m로 파악된다. ⓒ이정규
광화문 월대 가운데에는 임금이 다니던 폭 7m 정도의 어도가 있었다. ⓒ이정규
2007년 광화문 발굴조사에서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 1기가 경복궁 내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확인되었다. 이 난간석은 현재 일부 복원이 이루어진 월대 난간의 부재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에서 제일 오른쪽의 색 바랜 난간석이 바로 그것이다. ⓒ이정규
광화문 월대는 일제가 전차 노선을 광화문 앞으로 지나가도록 하면서 1923~24년 무렵에 훼철된다. ⓒ이정규
통의동선과 안국동선이 광화문 앞에서 Y자형으로 만나 광화문선으로 이어진다. ⓒ이정규
드러난 전차 선로의 침목이 역사의 아픔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이정규
의정부 영역 발굴현장의 모습. 이곳에서는 의정부 외행랑이 발굴되었다. ⓒ이정규
이번 프로그램의 해설을 맡은 서울시립대 신희권 교수가 의정부 서쪽 행랑터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정규
발굴현장을 모두 둘러본 후에는 운영부스로 돌아가 유구 보존 등에 대한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이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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