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7.18. 00:00

수정일 2014.10.05. 19:36

조회 1,004

흙(사진 뉴시스)

본능.
집이 불탈 때면 사람들은 먹는 일조차 잊어버린다.
그러나 불이 꺼진 뒤에는 잿더미 위에 앉아 다시 먹는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에서

[서울톡톡] 극작가 P선생이 모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미처 부고를 받지 못해 조문을 가지 못한 터라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배운 이치 중의 하나는 가까운 이의 경사에는 빠지더라도 조사에는 최대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단한 부조가 아니더라도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찾아주는 발길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줄 알기 때문이다. 죄송한 마음에 선생께 말로나마 위로를 전하고 나중에 찾아뵙겠노라는 문자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실로 여리고 속정 깊은 선생이 어머니와 영이별하고 어떻게 견디시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 도착한 답장.

--고마워요, 별아씨. 육친을 눈물 속에 보내드리면서도 밥을 먹었다오.

그 짧은 문장이 어떤 넋두리와 하소연보다 먹먹했다. 결국에는 그런 것이리라. 떠난 사람은 떠날지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만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건강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할 때, 인간이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지 않은 채 생존하는 기간은 60일이다. 물까지 없을 시에는 고작 8일밖에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일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다. 인간은 욕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강력한 본능을 동원한다. 아무리 큰 슬픔을 당해도, 아픔을 겪어도, 충격과 실의에 빠져도, 잠시잠깐 잊어버릴 수는 있을지언정 영영 본능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짐짓 잔인한 일이다. 배꼽시계가 정시를 가르치며 울어대면, 기어이 꾸역꾸역 먹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아무러한 고통이라도 사흘만 꼬박 굶고 나면 허기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했다. 구수한 밥 냄새와 달콤한 반찬 냄새를 맡으면 절망 속에서도 군침이 돌고 회가 동한다고. 이것이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는 속담의 처절한 증거이다. 그렇게 먹어대는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해 보기도 하지만, 마침내 용서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 니체의 일갈은 기실 이러한 삶의 진실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술한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토록 강력한 본능에 대한 확인이 곧 본능의 노예가 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본능에 대한 이해와 인정은 삶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보다는 삶이 본능이며, 그 삶의 본능에 충실하여 살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 존재라는 사실이다.

불은 한순간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뜨거운 화마(火魔)는 재산은 물론 추억까지 깡그리 태운다. 모든 것이 한 줌 재가 되어버리면 세상이 끝난 것 같다. 끝날 것 같다. 하지만 불탄 자리에도 거짓말처럼 움이 트고, 때로는 재를 거름삼아 더욱 창창하게 자라기도 한다. 그 잿더미에서 버티고 앉아 그래도 꾸역꾸역 삶을 먹고 마신다면, 끝끝내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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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인간본능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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