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달하는 은빛배달부

admin

발행일 2009.08.11. 00:00

수정일 2009.08.11. 00:00

조회 4,708

하이서울뉴스에 오늘부터 '인터뷰' 코너가 신설된다. 파리에는 '파리지앵', 뉴욕에는 '뉴요커'란 말이 있고, 그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일정한 이미지가 있다. 그렇다면 서울에 사는 서울인(人)들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 하이서울뉴스는 앞으로 '인터뷰'를 통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천만 서울 시민들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볼 것이다. 만남이 거듭되다보면 어느 순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소개할 '인터뷰' 코너의 첫 번째 주인공은 두 명의 은빛배달부다. 은빛배달부, 시적이기까지 한 이 용어는 다름 아닌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배송서비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시와 서대문구청, 구세군이 함께 2005년부터 진행하는 사업인 ‘은빛배달부’는 초기에는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제는 어르신 일자리사업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과거'를 잊을 줄도 알아야 해

은빛배달부 사무실은 홍은동에 위치한 홍은종합사회복지관 홍제동 별관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전 9시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10여 분의 어르신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이미 몇 분의 어르신들은 일을 나가신 후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과거를 밝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첫마디가 심상치 않았다. 험상궂은 젊은이가 말을 했다면 그려려니 했겠지만,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께서 밝히지 못할 과거가 있다니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부끄럽거나 막 살아서가 아니라 지난날에 연연하면 지금을 살 수 없으니까 그래. 그래서 모두들 옛 이야기는 잘 하지 않지.” 강정남(73) 할아버지는 은빛배달부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강 할아버지도 역시 젊은 시절에는 중견기업의 임원이었고, 다른 분들도 공무원, 군인, 사장이었던 분들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에 매여 있다 보면 일을 하기가 어렵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해.” 은빛배달부는 하루하루를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진 분들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관성처럼 몸에 배어서

강정남 할아버지는 은빛배달부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팀장이 하는 일은 일의 순서를 정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했는데, 위화감만 생기는 거야. 그래서 순서대로 비슷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지.” 자유롭게 일을 하다 보니 은빛배달부로 일하는 분들이 모두 경쟁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 몸에 배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였다. 그러나 그건 어르신들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고. 조금은 편안하게 일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싶은데, 또 다시 경쟁이 반복되는 것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중재자를 필요로 했고, 강정남 할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은빛배달부가 대충 일을 하는 건 아니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책임감이 남다르지.” 은빛배달부는 잡비를 번다는 목적도 있지만, 아직까지 사회에 필요하고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더 크다. 은빛배달부는 자식, 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면서 함께 자신의 존재감조차도 사라지는 것을 느낀 분들이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만족스럽다.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거야.”

보통 하루에 2~3건, 바쁠 땐 저녁 10시까지 일 하기도

“무게가 나가는 걸 못해. 화분, 서류, 의류 정도로 품목이 한정되지.” 은빛배달부가 취급하는 품목은 가볍고 들고 이동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 무겁거나 손으로 들고 이동할 수 없는 물건은 지하철을 이용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서울의 대중교통은 어느 나라보다 잘 되어 있어. 이렇게 나이든 사람들이 이용해도 하나도 힘들지 않거든. 서울 산책도 하는 셈으로 일을 나가지.”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서울의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빨라서 서울 어디든지 40분 정도면 오갈 수 있다고.

현재 은빛배달부의 한달 수입은 복지과에서 지원하는 10만 원을 포함해서 40~50만 원 선이다. 요즘에는 일이 없어서 20~30만 원 정도로 벌이가 줄어든 상황이다. 그러나 그 돈도 사무실 운영비로 10퍼센트를 공제하고 식대 등으로 쓰고 나면 정작 손에 쥐게 되는 금액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은빛배달부는 15명이고, 아침 8시 전에 모두 도착해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습관이 무서운 거야.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고, 갈 수 있는 건강이 된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 은빛배달부는 힘든 일은 아니지만, 많은 곳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건강관리가 중요하다. 참고로 은빛배달부의 활동영역은 서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의정부, 동두천, 인천국제공항 등은 물론 얼마 전에는 강원도 강릉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복지관의 도움으로 안정적으로 사업 진행할 수 있어

“한번은 케이크였는데, 밑이 빠지면서 바닥이 쏟아진 거야. 다시 같은 것으로 구입해서 고객에게 전해다 드렸지.” 일반 회사라면 이럴 때 배달부의 실수로 인한 것이므로 자신이 배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은빛배달부는 조금 다르다. 어르신들이 실수를 하거나,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할 경우에 복지관이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 당시 복지관에 말하니까 케이크값을 돌려주는 거야.” 강정남 할아버지는 안정적으로 일을 하는데 복지관의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처음엔 복지관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만 오는 줄 알았지.” 김종순(74) 할머니가 처음 복지관을 소개받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그러나 그게 오해였다는 것을 첫날 알게 됐다고. “노인들도 복지가 필요하고, 그런 일을 하는 곳이었지.” 그렇게 복지관과 인연을 맺은 김종순 할머니는 3년 간 은빛배달부로서 서울을 누비며 물건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작년 사무실 관리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작년에 무릎에 무리가 와서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복지관에서는 지금처럼 움직임이 적은 보직으로 옮겨 주었지.” 김종순 할머니는 그때처럼 고마웠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가장 좋았던 건 뒷방 늙은이가 되지 않았다는 거야. 여전히 뭔가 할 수 있고, 거기에서 힘이 나는 거지.”

현재 김종순 할머니는 은빛배달부에서 전화를 받고 할아버지들에게 일을 전달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또 하나, 할머니는 3년 정도 현장에서 일을 한 경험을 살려서, 가끔 길을 잃은 할아버지들이 전화를 해오면 네비게이션 역할도 한다. “전화만 하면 어떻게 가야 되는지 바로 알아.”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거들고 나섰다. “모르는 게 없지. 가끔은 존경스럽다니까.”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말년 보낼 수 있는 것이 좋아

“일을 하면서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지. 그리고 사실 일도 재미있어.” 김종순 할머니는 일을 하면서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말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말하는 중에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고 던지는 말이 아직까지 죽음이라는 단어가 낯선 젊은이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또 하나의 행복은 일을 하면서 인정을 받는 거라고 한다. 물론 초창기에는 모두들 해보지 않은 일이라 어색했지만, 이제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서비스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도 친절해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따로 친절 교육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들 다양한 사회경험으로 조금만 자극을 줘도 금방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신건강’…변화 받아들이고 욕심은 버려야

“노인분들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정신건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김종순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도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처럼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눈을 두고 있으면, 지금의 삶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 마음을 비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말년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신건강이라는 설명이다.

이어 어려운 점은 없느냐고 묻자 “요즘엔 일이 줄어서 하루 1건 정도를 하는데, 그 1건이 6천 원이야. 하루 한 끼 식사비밖에 안 되지.” 은빛배달부의 가장 큰 불편은 역시 식사라고 한다. 그 외에는 돈이 들어갈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벌어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일해서 번 돈으로 손자들에게 장난감이라도 하나씩 사 주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이다. 그러기에는 식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는 점을 아쉬워한다. 하루에 밥 한 끼 먹으러 나오는 것 같아 가끔은 쓸쓸하기도 하다고.

“주변에 장애인과 불우노인을 위한 무료식당이 운영 중인데, 이곳에서 무료는 아니더라도 단돈 2~3천 원에 식사를 할 수 있어도 좋지.” 김종순 할머니는 그동안 생각했던 해결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복지관측에서는 형평에 어긋나고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물론 어르신들이 나라에서 하는 일에는 눈들이 많아 조심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나, 조금은 배려를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은빛배달부는 이미 많은 기업체들에서 이용하고 있고, 그에 대한 반응도 긍정적이다. 공신력을 가지고 일을 하다 보니 은빛배달부들의 자부심도 남다르다. 은빛배달부가 지금처럼 앞으로도 오래도록 자부심을 가지고 기쁨과 희망을 서울 시민들에게 배달하기를 바래본다.

시민기자/김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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