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는 대충 알겠는데…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7.11. 00:00

수정일 2012.07.11. 00:00

조회 4,644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글쎄요? 비변사는 들어본 것 같은데, 다른 두 곳은 전혀 모르겠는데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오른편으로 건널목을 건너면 길 모서리에 비변사 옛터 표지석이 있다. 그리고 종로3가 쪽으로 향하는 근처에 통례원과 종부시터 표지석도 서 있다. 그러나 길가에 서 있는 작은 표지석에 관심을 보이는 시민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 지나가는 시민들 몇 사람에게 비변사와 통례원, 그리고 종부시가 무슨 관청이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자 비슷한 대답을 한다.

정말 그랬다. 비변사는 조선 중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했던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으로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묘당, 주사라고도 불렸다. 표지석에는 '비변사 터, 조선시대 외적의 방어와 국가최고정책을 논의하던 관아 터, 중종 때 창설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 되었음'이라 적혀 있다.

조선시대의 중앙 정치체제는 왕권과 의정부, 이·예·호·병·형·공조의 6조, 그리고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삼사가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체제였다. 의정부는 최고의 정책조정 기관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렸고, 육조는 행정 실무를 담당했다. 삼사는 권력 행사에 부당함은 없는지 견제 작용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국방과 군사 업무는 원칙적으로 의정부와 6조 중의 국방과 군사를 담당하는 관서인 병조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했다.

그런데 성종 때부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신속하고 실정에 맞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의정부의 3정승인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을 포함하는 원상(왕이 정상적인 정치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이를 대리하던 원로 재상)과 병조, 그리고 국경 지방의 군사요직을 지낸 인물들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군사 전략을 협의하게 되었다. 이들을 지변사재상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던 중 중종 5년인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지변사재상을 급히 소집하여 방어책을 논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필요에 따라 편의적으로 운영 유지해오던 지변사재상과의 협의제를 고쳐 비변사라는 비상시국에 대비하는 임시기구를 만들었다.

비변사는 그 뒤 1517년의 북방 여진족 침입, 1522년의 전라도 연안에 침입한 왜구의 방어 대책을 강구하는 과정을 거쳐, 1554년(명종 9) 후반부터 잦아진 변방의 외침과, 이듬해 을묘왜변으로 이어지면서 독립된 합의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정책결정관청이며 권력기관은?

드디어 1554년부터 비변사 당상관들은 종래처럼 빈청에 모이지 않고 비변사에 모여 변방의 외침과 군사 문제를 논의, 처리하는 독립된 관청이 되었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비변사는 국난을 수습, 타개하기 위한 최고기관으로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비변사는 수령의 임명, 군율의 시행, 논공행상, 대외적인 병력지원요청, 둔전, 공물 진상, 시체 매장, 군량 운반, 훈련도감의 설치, 산천 제사, 정절의 표창 등 군정과 민정, 외교는 물론 국가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처리하였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기능이 확대, 강화된 비변사는 효종 때 폐지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군사 문제를 협의하는 관청이라는 업무한계를 넘어 왕실 비빈의 간택까지 처리하는 등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옛 의정부의 권한을 훨씬 뛰어넘는 명실공이 최고의 권력정책기관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말인 고종임금시절 흥선대원군에 의해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가 결국 폐지되고 말았다.

왕실을 돕는 종친들의 친목도모기관

통례원은 조선 시대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하고 조회와 의례를 관장하는 정3품 아문이었다. 조선은 태조 원년(1392) 7월에 관제를 처음 만들 때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각문을 두어 관제와 조회, 의례를 관장케 했는데, 각문은 통례문의 별칭이었다. 통례문은 세조 12년(1466) 1월 관제를 변경할 때 통례원으로 개칭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통례원은 예의를 관장했는데, 관원으로는 좌통례(정3품 당하관)와 우통례 각 1인, 상례(종3품) 1인, 봉례(정4품) 1인, 찬의(정5품) 1인, 인의(종6품) 8인을 두고 있었다.

표지석에는 '통례원 터, 통례원은 조정의 의례와 하례 제사와 의식 때 안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태조 원년(1392)에 각문이라 하였다가 곧 통례문이라 고쳐 불렀고 1414년에 통례원으로 다시 고쳐서 유지하다가 1896년에 폐지하였다. 통례원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쓰여 있다.

종부시는 왕실의 계보인 보첩을 관장하던 관서로 고려 목종 때 전중성으로부터 비롯되어 그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조선시대의 종부시는 1392년(태조 1) 태조가 관제를 만들 때 전중시로 출발하여 1401년(태종 1)에 종부시로 개칭되었다. 그 뒤 재내제군부에 속했다가 세종 12년에 재내제군부가 종친부로 개칭되면서 다시 독립하였다.

종부시는 왕실 밖 종친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종친들의 비위를 규찰하며 10년에 한 번씩 '선원록'을 펴냈다. 선원록은 왕실의 족보로 국가에서 관리하는 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책이다. 또 3년마다 종실보첩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그 밖에 왕실의 왕자와 공주, 옹주의 혼인이 있을 때에는 의식에 따른 제반 준비를 하는 일도 주관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부시의 관제는 도제조 2인, 제조 2인, 정 1인, 첨정 1인, 주부 1인, 직장 1인으로 되어 있다. 도제조는 뒤에 대군과 왕자군들 중에서만 임명되었다. 아전으로는 서리 10인과 조례 20인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종친부로 흡수되었다. 표지석에는 '종부시 터,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를 편찬하고 종실을 관리하던 관청인 종부시가 있었던 자리'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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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변사 #통례원 #종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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