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꽃과 과일, 누가 조달했을까?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3.16. 00:00

수정일 2012.03.16. 00:00

조회 3,021

사진좌-온실재배도 가능했던 영산홍 | 사진우-장원서 표지석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예나 지금이나 국가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청들이 필요하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의 중앙부서에 해당하는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 6조는 물론 포도청이나 사헌부라는 이름은 모두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원서‘라는 관청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장원서는 어떤 곳일까?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마을인 북촌 언덕을 오르는 좁은 길. 경복궁이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축대 밑에 ‘장원서 터’라는 작은 표지석이 하나 서있다. 표지석에는 ‘궁궐의 후원과 각지의 과수원을 관리하고 궁중과 여러 관아에 과일과 화초 등을 공급하던 관아 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편 38권에는 ‘관습도감은 장악서로 이름을 고치고 장악 하나를 두었다. 침장고는 사포서로 이름을 고쳐서 사포 하나를 두었고, 상림원은 장원서로 이름을 고쳐 장원 하나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원서는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때 상림원이라는 관아를 개편하여 만든 관청이었던 것이다.


사진좌-장원서에서 가꾼 궁궐의 소나무 | 사진우-장원서 조달품목이었던 사과

왕실과 관아에 과일과 꽃을 조달하고 궁궐의 조경을 담당

그럼 장원서는 실제로 어떤 일을 하던 곳이었을까? 궁궐의 정원인 후원을 조경하여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편 44권에는 이런 기록도 남아 있다. 장원서 별감 김호산이 와서, 본서의 관원 등이 진상할 과실을 남용한 일을 고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자에 의영고의 관리들이 관물을 남용한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잘못이다. 만약 일찍이 ‘육전(六典)’을 반포했더라면 모든 재용의 출납 법식이 정해져서 어찌 남용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소홀히 간수하면 바다라도 훔쳐간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만약에 관물을 도둑질하여 자기 집에 썼다면 이것은 바로 장리(도둑질하는 관리)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장리라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장원서의 실과는 병에 소용되는 바가 더욱 절실하기 때문에, 혹은 어버이의 병을 위하여 이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맡아서 지키는 자가 따르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고 하여 너무 엄하게 문책하지 말 것을 지시한 내용이다. 장원서가 하는 일이 궁궐의 정원을 가꾸는 일 외에 왕실에 과일을 진상하는 일이고, 당시에 과일은 질병의 치료에도 긴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왕조실록과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원서의 조직은 직급이 매우 낮았다. 정6품과 종6품인 장원과 별제. 그리고 나무와 꽃, 과일, 동물을 담당했던 잡직들로 종6품과 종9품의 말직 벼슬아치들이 종사했던 정6품아문이었는데 대전회통에서는 종6품아문으로 격이 한 단계 낮아지기까지 했다. 장원서는 크게 과원색, 생과색, 건과색, 작미색, 장무색으로 구분했다. 과원색은 각종 과수와 화초 재배를 관장했다. 재배할 과수와 화초는 각 처의 동산직이 골라서 받아들이도록 했다.

생과색은 배, 밤, 은행, 석류, 유자 등의 생과를 종묘의 각 실에 천신(새로 나는 물건을 먼저 종묘에 올리는 일)하고, 왕실의 생일과 명절에 진상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건과색은 곶감, 호두, 잣, 대추, 황률 등의 건과를 진상하는 일을 맡았다.

불을 때고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기름종이를 사용한 온실재배 영농기술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에도 온실에서 꽃과 과일을 재배했다는 기록이다. 왕조실록 성종 편 13권에는 장원서에서 영산홍 한 분(盆)을 올리니, 전교하기를 “겨울 달에 꽃이 핀 것은 인위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올리지 마라”고 지시한 것이다. 성리학에 젖어있던 당시의 사고로는 겨울철에 인위적으로 꽃을 피우게 했다는 것이 순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겨울철에 영산홍 화분을 올린 것은 당시에도 ‘온실 재배’ 방식이 관행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온실의 축조와 땔감의 확보를 위해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온실은 땔감을 태워 적절한 온도를 확보하는 방식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온실은 태양광을 단순하게 이용한 고대 로마시대의 온실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온돌을 이용한 난방시설과 함께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끓여 따뜻한 수증기로 내부온도를 높였다. 온실지붕은 기름먹인 한지를 사용하여 채광과 실내 온도는 물론 습도까지 조절했다고 한다.

유교와 성리학이 지배하던 신분제 시대에 크게 대접받지 못하고 미관말직의 관아였던 장원서, 후세의 사람들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관청이었던 장원서는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과학적인 영농기술을 꽃피웠던 자랑스러운 관아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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