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의 천년고찰 봉원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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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07.17. 00:00
시민기자 송유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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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후문에서... 봉원사 가는 길은 너무 멀다? 번잡한 신촌의 연대와 이대 후문 산책로에 천년고찰 봉원사가 있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신촌에 가면 봉원사 구경을 꼭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항상 잊어버리고 만다. 어떤 날은 바로 봉원사 산문 아래 화려한 카페에서 지인들을 만나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노닥거리면서도, 봉원사 생각은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내게 봉원사는 신촌에만 가면 잊어버리고, 황지우 시인의 시집을 들추면 그리워지는 절 이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지인에게 빌려 온 카메라를 돌려주기 위해 나온 약속이 어긋나는 바람에 내 발길은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봉원사 산문을 넘었다. 신록으로 우거진 여름 땡볕 쏟아지는 천년고찰 봉원사 빈 마당의 적요는 왜 이리 낯설까. 그러면서도 그 낯선 적요 속에서, 나는 봉원사 산문 아래 골목골목 누비며 가택수사를 당하는 여느 학생의 자취방 앞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듯 … 아니 갑작스런 죽음으로 저승에 온 느낌 같았다. 그리고 곧 키가 큰 연잎들이 사근거리는 연못가의 귀신 사자의 귀여운 미소에 온갖 아우성 같은 번뇌의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영조, 임금님 친필이 소실되었다니... 봉원사의 그 옛날 이름은 반야사. 이 절은 대한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889년(진성여왕 3년)에 도선국사가 현 연세대(연희궁) 터에 창건한 이 절은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보우 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한 것이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찬탄 받았다고 전한다. 다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지인 스님이 크게 중창한 후, 다시 1748년(영조 24)에 찬즙·증암 두 대사가 현 위치로 이전 중건하면서 봉원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당시 영조의 친필로 쓰인 봉원사라는 현판은 6 ·25전쟁 때 소실되고, 명부전의 글씨는 정도전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로 불리기도 황지우 시인의 '집'에서 화자되는 봉원사는 모든 길은 집에서 나오므로/모든 길은 집에서 떠나므로의 집 밖의 공간이다. 황시인의 시를 빌자면, 사람은 가끔 집(육체) 밖에서 스스로를 보고 깨달아야 하는 집으로 가는 도정의 나그네임을 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서 현재까지 많은 이 '집(봉원사)'을 거쳐 간 인물 중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이색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ㆍ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 휴엄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고, 다시 제21대 영조 24년(1748)에 찬즙, 증암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으며,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事)라 현액하니, 신도들 사이에서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가 설치되었으며, 제25대 철종 6년(1856) 은봉, 퇴암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동인 스님과 함께 개화파 일당의 갑신정변 요람처가 되다 나는 시원한 풀벌레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천년나무 그늘 아래서 문득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불교는 이미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현실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면서 고뇌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 이처럼 황지우 시인 역시 '집'을 통하여 철저한 현실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며 고뇌에 대한 투쟁의 중심체로서의 봉원사임을 읽는다. 조선 말기 젊은 피가 끓는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던 봉원사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兵火)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모든 길은 집으로... 1966년 주지 영월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의 별처였던 아소정을 헐어 옮긴 것. 1991년 32세 주지 김성월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을 건립하던 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지 혜경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단청) 이만봉 스님과 제50호(범패) 영산재보존회에서 단청과 범패분야의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모든 길(道)은 끝내는 집으로 가는 길, 그 길(道)의 열반에 든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은 열개가 넘고, 보살의 이름 또한 헬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중생은 고작 한 개의 이름으로 찰나와 같은 생을 살다간다. 불공견색관음은 고해에 잠기는 중생을 그물이나 실로 건진다는 뜻… 머리 위에 마두가 있는 분노상은 마두관음보살… 허공과 같이 무진장 지혜와 덕공을 가지고 있는 허공장보살을 향해 합장해 본다. 그때 다정불심처럼 승복 입은 보살 한분 내게 다가와 말을 전한다. 곧 봉안사 연꽃 축제라고. 그때 오시면 더 풍성한 봉안사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내게 마치 감로수처럼 시원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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