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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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02.02. 00:00
시민기자 이혁진 | |
지난 설 연휴 최근 개방된 경복궁의 후원을 찾았다. 이곳은 청와대와 근거리지만 그간 복원작업 때문에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광화문을 제외한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이 후원이 공개됨에 따라 국내외 관광객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후원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곳은 건청궁(乾淸宮)이다. 건청궁은 경복궁 가장 뒤쪽 은밀한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기거했다. 남쪽 연못 향원정에서 바라본 건청궁은 아닌게아니라 새집같이 숨어 있는 모양새다.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殿閣) 중에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그래서 궁궐 안의 궁이라고 한다. 건청궁은 왕의 처소인 장안당,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부속건물인 복수당 등으로 이루어졌다. 건청궁을 지은 사람은 고종이다. 그는 1873년(고종 10년)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 자립을 했다는 선언적 의미로 건청궁을 세웠다. 그러나 1876년 경복궁에 큰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85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하지만 고종이 건청궁에 기거한 것은 10년 남짓이다. 특히 1895년 8월 20일(음력) 명성황후가 일본의 계략에 의해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된 을미사변이후에는 고종은 경복궁을 벗어나려고 했다. 급기야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변복을 한 채 황태자만 데리고 신무문으로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이처럼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은 조선말 비운의 역사현장이다. 특히 건청궁에서 정파 세력의 틈바구니에 황후가 시해되리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국모 시해도 조선침략 차원에서 자행됐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경복궁 전각을 하나 둘 파괴하면서 경복궁을 거의 훼손했다. 건청궁도 1909년 헐리게 된다. 경복궁 말살은 조선총독부건물을 세우는 등 일제의 잔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물론 경복궁외 우리 궁궐에 대한 일제의 파괴정책은 해방 때까지 계속됐다. 궁궐 자체가 우리 역사요 문화라는 점에서 우리가 궁궐을 새로 복원하고 민족의 자주성과 자긍심을 세우려는 노력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지금의 건청궁은 2006년 복원을 마치고 2007년 10월부터 1일 3회 총 60명으로 관람객을 제한해 왔지만 이번에 전면 개방됐다. 역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슬픈 과거도 역사적 교훈으로 기억돼야 한다는 반증이다. 바로 이것이 경복궁 복원의 참다운 의미일 것이다.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 상태지만 공개된 건청궁은 국모 명성황후의 원혼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내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 또한 옥호루 앞에서 한참 동안 상념에 사로잡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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