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야, 관광버스야?

admin

발행일 2010.01.11. 00:00

수정일 2010.01.11. 00:00

조회 4,270



시민기자 정연창


“여기, 마포는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 전차 종점이 있던 곳입니다. 서해안이나 강화도 방면에서 나룻배에 소금과 새우젓을 싣고 와서 양화나루나 여의나루, 마포나루에서 팔던 곳입니다. 마포나루는 서울의 대표적인 나루터로서 경기의 농산물이나 황해의 수산물이 여기를 통해서 들어왔었습니다.”

마포의 한 버스정류장. 손님을 태운 버스기사가 헤드셋을 쓰고 지역의 유례를 설명해준다. 이 별난 버스기사는 메트로버스의 조승형 씨다. 그가 운전하는 260번 버스는 중랑구 신내동의 공영차고지를 출발하여 망우리, 청량리, 종로, 마포, 영등포, 개봉동을 거쳐, 서부트럭터미널 뒤에 위치하고 있는 ‘양천공영차고지’를 갔다가 그대로 돌아오는 장거리노선이다.

2004년 버스개편과 함께 노선이 대폭 바뀌면서 그는 안내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버스개편이후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아저씨, 어디를 가려는데 도대체 몇 번 버스를 타야 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운전하는 노선만 알지 다른 노선을 안내 해줄 수가 없었어요. 서울에서 버스운전을 한다고 하면서 손님의 물음에 답변을 못한다는 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이 끝나면 정류장을 돌면서 노선번호를 적었습니다. 아! 여기서 몇 번 버스를 타면 어디를 갈 수 있구나 하면서요.”

일이 끝나고 남는 시간에 인터넷을 뒤지고, 발품을 팔아 일일이 버스노선과 정류장을 익히고, 운행하는 노선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고궁과 유적지를 찾아가 지역의 유례와 전설, 고궁의 역사를 일일이 메모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의 결실로 멘트가 완성되면 가족에게 먼저 시연을 했고, ‘그 정도면 됐다’는 가족들의 'OK 사인'이 나오면 비로소 손님들에게 멘트를 사용했습니다.” 조씨는 가족들 중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딸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2004년 어느 날 완성된 노선안내멘트를 손님들에게 처음 사용해 봤다. “이번 정류장에서 261번을 타시면 동대문 운동장을 지나서 을지로, 롯데백화점, 남대문시장 방면으로 갈 수 있습니다. 조씨는 도로가 갈리는 곳에서 노선을 설명해드리고, 룸미러로 손님의 반응을 살폈다. “손님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좋은 거예요. 인사도 잘 하고 친절한 버스기사가 노선번호까지 일일이 알려준다는 거죠. 목적지에 도착한 손님들은 하차하면서 기사님, 몰랐던 노선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오히려 저에게 인사를 하면서 내려가는 거예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거 괜찮구나.”

조씨는 노선안내뿐 아니라 지역의 유례도 멘트에 포함시켰고, 레퍼토리의 숫자도 점점 늘어갔다. 방송이나 신문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들은 빼고 되도록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를 찾아 손님들에게 전해 준다. 구성에서 원고작성 그리고 암기까지 한 꼭지를 완성하는 일은 보름에서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되는 힘든 작업이다. “저희 집이 신내동인데 신내동에서 회사까지 오는데 걸어오면 20여 분 걸립니다. 버스가 있지만 버스를 안 타고 적은 원고를 암기하면서 회사에 출근을 합니다. 이때 외우고 또 외워서 이제는 방송을 해도 되겠다고 자신이 생겼을 때 방송을 시작하게 되지요.”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여기, 경희궁은 서울에 남아 있는 다섯 개 궁궐 중 하나로서 서쪽에 지어져서 서벌궁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궁은 1620년도에 지어졌습니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10여 명의 임금들이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현종과 숙종은 평생을 보내기도 했던 곳입니다. 숙종은 이곳 화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택시와 마을버스 기사를 거쳐서 14년째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다는 조씨는 자신의 안내방송 이후 이 회사의 모든 버스기사들이 헤드셋을 쓰고, 손님들에게 안내방송을 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지난해 서비스평가에서 서울시 전체 버스회사 중 2위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는 물론 회사 홈페이지에 감사의 글도 올라오고 손님들의 반응은 뜨겁다. “젊은 사람들도 그렇고, 나이 드신 분들도 뒷자리에서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세요.” 조씨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방송과 신문에 조씨의 이야기가 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직원 조례회 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3.1절 기념 보신각타종자로 선정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눈치껏 해야 칭찬을 받는 법. 승객들의 잠이 덜 깬 이른 시간이나 조용히 갈 만한 시간은 피하고, 한낮이나 퇴근시간, 밀리고 짜증나는 길목에서 방송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끔은 즉흥 방송도 있어야 맛이 난단다. “미리 만들어 놓은 멘트가 있지만, 즉석에서 하는 멘트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금 전에 나이 드신 어르신이 올라오시니까 앉아 있던 자리를 선뜻 양보해주신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분께 부자 되시라고 박수 한 번 쳐 드립시다!' 이렇게 즉석 멘트를 하면 손님들이 다 박수를 치면서 버스 안에 분위기가 훈훈해진다고 한다.

“지금도 쉬는 날이면 다른 회사의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손님 입장이 되어봅니다.” 손님 입장이 되어 보면, 어떨 때 손님들이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저는 버스기사가 천직입니다. 앞으로도 손님들을 위한 멘트는 계속 만들 생각입니다. 노선 안내와 지역 유례뿐만 아니라 건강상식, 날씨, 뉴스 등도 준비하여 손님들에게 들려줄 생각입니다.” 길이 막히거나, 무료한 낮 시간, 그의 버스는 구수한 그의 입담으로 손님들이 즐겁다. 실타래 풀리듯 술술 흘러나오는 동네 이름의 유래와 옛날이야기들, 정류장마다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가 끊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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