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러시아 공사관

내손안에서울

발행일 2005.08.31. 00:00

수정일 2005.08.31. 00:00

조회 1,902



시민기자 최근모

예전 국사책에서 구한말 역사를 공부할 때 아관파천[俄館播遷] 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무언가 대단히 어려운 뜻이 있다는 느낌에 다음 날 시험을 위해 무조건 달달 외웠던 생각이 난다.
요새 서울시내 답사를 다니며 그저 시험문제만을 위해 외웠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내 발과 눈으로 직접 느낄 수 있어 많은 공부가 되고 있다.

어제 간 곳은 그 아관파천의 현장인 구 러시아 공사관 이였다.
사실 이곳은 정동길을 자주 가보았지만 쉽게 보지를 못했던 곳이다. 일반인이 보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 놓은 것도 아니요, 딱히 비싼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내 게으름에 문제도 있지만 정동 길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동교회나 시립미술관과는 달리 이곳 구 러시아 공사관은 그 위치를 가늠하기 쉽지가 않다.

성 프란체스코 회관과 예원학교 사이에 난 언덕길을 올라가면 정동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면 언덕위로 우뚝 솟은 새하얀 탑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구 러시아 공사관 전체 건물에서 유일하게 남은 탑 부분인데 이국적인 모습을 물씬 풍긴다. 물론 러시아인이 설계했으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국사책에서 조그만 사진으로 보던 모습을 실제로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탑으로 접근하는 계단은 제법 위용이 있었는데 공원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이 탑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그러나 계단이 끝나고 탑만 남은 구 러시아 공사관 입구에 서자 지금까지의 환상이 모두 깨졌다. 나무에 가려진 탑은 가까이에서도 그 모습을 확실히 보기가 쉽지 않았고 게다가 입구는 들어오라는 것인지 들어오지 말라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어수선했다.


게다가 이곳에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지 말라는 누군가의 싸인펜으로 쓴 안내판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물론 동네에 저런 것을 둔다면 어느 정도 어울릴 수 있겠으나 사적 제253호로 지적된 엄연한 역사 유적지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건물 연혁으로 봐도 100년이 넘었으며 구한말 외세의 침탈 앞에서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최소한의 주변정리가 필요하다.

일단 가까이 다가가 탑의 전면부를 살펴보았다. 3층으로 된 탑은 일층에는 출입구가 몇 개 나 있었다. 구리빛 파이프가 지면에서 3층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3층에는 아치형 창문이 나 있었다. 이곳이 아마 전망대 역할을 했지 않나 유추해본다.

앞마당에는 이 탑과 붙어있던 건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당신에는 꽤 컸으리라 생각되지만 6.25 전쟁 당시 모두 소실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전망탑 뿐이다.


여기서 잠시 아관파천에 대해 알아보면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자 고종 임금은 일본과 친일내각에 둘러싸여 경복궁에서 암살의 위협을 받으며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고종은 경복궁 신무문으로 몰래 빠져 나온다. 일국의 왕이 자신의 왕궁에서 나오는데도 몸을 숨기고 탈출을 감행해야 했으니 당시의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의 침탈행위가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 알 수 있다.

고종은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향후 일년 가량을 이곳에서 머문다. 그동안 위세 등등하던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러시아를 등에 업은 친러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러시아 또한 일본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때부터 일본을 대신해 러시아가 조선의 경제적 이권과 관련된 사업을 침탈한다. 범을 쫓으려다 오히려 또 다른 범을 불러들인 셈이었다.

고종은 다음해인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간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기운 국운은 그로부터 얼마가지 않아 일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다.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 이곳 뜰 앞에 수백의 일본군인과 대포가 공사관을 둘러싸고 시위를 하였다고 하니 일본의 횡포를 여실히 보여주는 소중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답사를 마치고 길을 내려오는데 길가 옆 공연장에서 난타를 본 한 무리의 일본인 관람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쾌한 공연을 보고 모두 만족한 듯 웃음이 떠나갈 줄 몰랐다.
그들에 섞여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홀로 남아있는 전망탑을 보고 있자니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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