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가 있는 풍경

내손안에서울

발행일 2003.12.08. 00:00

수정일 2003.12.08. 00:00

조회 2,163



시민기자 이덕림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초겨울의 하늘. 창공을 배경으로 농익은 주홍색 감들이 한 폭의 정물화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까치밥만 달랑 남긴 감나무들이 있는가 하면,주인의 여유로 아직도 탐스런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도 있습니다. 까치밥에 까치 대신 참새들이 몰려와 홍시 맛에 반한 듯 떠날줄을 모릅니다. 요즘 우리 동네 골목 풍경입니다.
내가 사는 은평구 신사동과 이웃 동네인 역촌,구산,갈현동 등 주택가치고 감나무 한 두그루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이니 서울도 어느새 감의 명산지가 된 모양입니다.
매화(梅花)처럼 한-중-일 동양3국에서만 자란다는 감나무. 우리나라에선 중부 이남에서만 된다던 감나무가 지구온난화로 북방한계선이 점차 북상하면서 서울의 가을과 겨울 풍경을 한층 정겹고 푸근하게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감나무만큼 향수가 짙게 배인 나무가 또 있을까요? 황금색으로 물든 가을 들녘과 어우러진 시골집 뒤꼍의 감나무는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기억상자의 한 켠에 빛바랜 사진으로 고이 간직되어 있으니까요.

지난 주말 비내리는 아침, 타고 가던 152번 시내버스가 을지로입구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멈춰 섰을 때 물방울이 번지는 오른 쪽 차창너머로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잎사귀를 다 떠나 보낸 그 감나무는 차가운 겨울비를 맨몸으로 맞으며 로터리옆 녹지 한 구석에 서있었습니다. 키에 비해 줄기와 가지가 가녀린, 그래서 허약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인 그 감나무에는 갓난애기 주먹만한 감들이 올망졸망 달려 있었습니다. 눈대중만으로도 50~60개는 족히 될 그 열매들을 맺고 익히기까지 감나무는 도심의 소음과 탁한 공기 속에서 얼마나 산고(産苦)를 겪었을까를 생각하니 무척이나 대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난 과일나무들에 꼭 예비(禮肥)를 주셨습니다. 과일을 생산하느라 애쓴 나무들에게 감사의 예로 주는 비료이기에 ‘예비’라고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둘레를 널찍이 판 다음 두엄과 썩힌 계분을 함께 묻어 주시면서 그래야 한 겨울에도 나무뿌리를 따뜻하게 보호해 주어 이듬 해 봄 건강한 새 싹을 내고 결과가 풍성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다시 을지로입구 사거리를 지나다가 차창 너머로 눈길을 돌려 그 감나무를 찾았습니다. 맑게 갠 12월의 차가운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정물화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참 저 감나무에 예비는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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