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와 위기 사이에서...인문학이 대체 뭐길래?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6.06.17. 13:24

수정일 2016.06.17. 15:48

조회 1,180

책ⓒ뉴시스

희망이 덧없다는 것, 이는 절망한 이들의 말이 아니라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이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를 보지만 모두가 신기루다. 희망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품는 것이지만, 미래로 갈수록 덧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실질적인 것이 된다.
희망을 내일에 거느니 오늘에 걸고, 희망을 거기에 거느니 여기에 걸겠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이 글을 쓰던 날, 나는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고병권, 《“살아가겠다”》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28

모 기업으로부터 사원들에게 ‘인문학’ 강연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여성들을 주 소비층으로 하는 유통회사였기에, 내가 그간 소설로 작업해 온 역사 속 여성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담당자는 여성 사원들이 많은 조직이라 주제가 적합할 것 같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통화를 마친지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다시 전화가 왔다. 윗선에서 그것 말고 ‘인문학’ 강의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와 문학이 인문학이 아니면 무엇이 그들이 원하는 ‘인문학’일까? 요즘 트랜드인, 재벌이 전도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그런 ‘인문학’의 약을 팔 재주가 없기에 나는 강연을 거절하고 말았다.

무엇이 인문학일까? 정작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과는 취업률이 낮다고 요상한 이름으로 바꾸거나 아예 없어지는 판인데, 텔레비전에는 난데없는 ‘인문학자’들이 설치고 기업에서는 연수 때마다 구색 맞추듯 인문학 강의를 기획한다. 전혀 창조적이지 않은 ‘크리에이티브 워크샵’이나 혁신을 다시금 새롭게 외치는 것이 전부인 ‘혁신 워크샵’ 만큼이나 허황하다.

인문학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고민할 때 철학자 고병권의 책은 어둠 속에 오솔길을 밝히는 등롱 같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은 길 위의 인문학, 사건의 시공간인 현장의 인문학이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거기가 아닌 여기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스승이자 도반이자 학생이다. 그가 노들야학 장애인 학생들에게 니체를 강의할 때의 일화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뜨거운 대답이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신체에 대해 ‘우리 안에 맹수들이 살고 있다’고 했던 말을 소개한다. 맹수란 우리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욕망이나 충동을 상징하는 것인데, 순간 학생들이 보인 반응이 놀라웠다.

“갑자기 여러 학생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손을 휘젓고 휠체어를 들썩였다. 비(B)는 급작스레 근육 강직이 일었고, 시(C)는 자기를 손으로 가리켰으며, 디(D)는 ‘내가 그렇다’고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번 읽었고 여기저기서 강의도 많이 했지만, 그 문장에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처음이었다...그 순간 이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문장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듯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두어두었을 우울과 분노, 슬픔, 격정이 쇠우리에 갇힌 괴물처럼 자기 안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학은 본래 용기”라고, 오직 “살아가겠다”는 선언으로 삶에 맞서는 일이라고. 그것이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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