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된 오빠의 기막힌 인생
최경
발행일 2016.03.17. 17:46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17)
한 대도시, 허름한 여관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었다. 큰 불도 아니고, 현관문 앞에 신발 몇 개를 모아놓고 불을 지폈다고 한다. 다행히 여관주인이 초기에 발견해 큰 피해는 없었다. 방화미수범은 1년 넘게 장기 투숙하던 C씨. 여관에 투숙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었고, 갈등도 없었다는 C씨는 대체 왜 여관에 불을 지르려 한 것일까?
사실 여관 방화미수사건은 단순한 사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맡았던 경찰도, 변론을 맡았던 국선변호사도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C씨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C씨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없었고, 10년 전 사망선고까지 돼 있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불을 지른 이유는 교도소에 가기 위해서였단다.
“온 몸이 퉁퉁 부어서 잘 걷지도 못했어요. 이 양반이 살려달라는 심정으로 불을 지른 거예요. 간곡히 원했다고 봐야지요. 구속을 시켜놓으면 치료는 해주잖아요.”
검찰에 송치된 뒤에야 C씨는 병원에서 중증의 심부전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분이 없어 무료 진료병원도 이용할 수 없었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도소행을 택했던 것이다. 두 달 뒤 C씨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또 어딘가에서 교도소로 가기 위해 범죄를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행방이 묘연한 상태, 그나마 여동생과 겨우 연락이 닿았다. 막내 여동생도 C씨가 수감돼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면회를 한번 갔었는데 출소한 뒤로는 어디에 있는지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취재진에게 오래된 사진을 한 장 보여줬다. 그런데 사진 속에 C씨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남자인 것 같기도 하고 옷차림을 보면 영락없는 여자 같기도 했다.
“둘째 오빠인데 언니가 됐어요. 참 기가 막힌 일이죠. 오빠가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형편이 무척 어려웠는데, 어머니를 가장 많이 도와줬어요. 그러다 여자 되고나서부터 가끔 보긴 했는데 소식이 끊겨 버렸죠. 모두 너무 어렵게 살아서 돌아볼 틈이 없었어요. 그래도 저는 늘 마음에 걸렸었어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연락하면서 지내면 좋은데, 또 전화 한통 없더라고요.”
C씨는 67세로 이미 오래 전에 여성이 된 트렌스젠더였던 것이다. 그 시절 남자가 갑자기 여자가 됐으니,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좋게 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락을 끊어버렸던 게 아닐까. 결국 10년 전, 상속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제들은 어쩔 수 없이 실종선고를 신청했고, 이것이 사망선고로 이어졌다. 그래서 C씨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취재진은 C씨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자주 머물렀다는 곳에서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마침내 C씨를 만날 수 있었다. 허름한 여관, 비좁은 방에서 지내고 있는 C씨. 말투며 몸짓, 그리고 방 곳곳에 보이는 화장품이며 장신구들에서 오랫동안 여성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물여덟 살 때인 70년대 중반,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됐다는 강씨는 당시 가족들조차 범죄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다고 말했다.
“나를 미워하더라고, 내 팔자를 이렇게 만들었다고요. 머리까지 잘리고 그랬다니까요. 내가 내 인생 사는데 뭐가 어떠냐고 그랬죠. 어떻게 하겠어요. 천성이 그런 걸, 운명이 그런 걸 나도 어쩔 수 없는 건데...”
하지만 C씨는 법적으로 여전히 남자였다. 한때 법적으로도 여성이 되길 바랐지만, 신원조차 없는 상태로 지내다보니, 이젠 그저 살아있는 존재이고 싶다고 했다. 이제와 성별을 따지는 건 그녀에겐 사치인 듯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부터 머슴살이까지 하며 집안 가장노릇을 했지만 가족들은 여자가 된 C씨를 불편해 했고, 먼저 연락하는 형제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먼저 가족을 찾아갈 용기도 없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내민 한통의 편지는 바로 교도소에 있을 때 막내여동생이 보낸 것이었다. 오랜 시간 살아있는지 궁금했고, 늘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는 여동생의 편지... C씨는 이 편지를 볼 때마다 울었다고 했다. 그녀도 가족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취재진은 이들 자매의 만남을 주선했다. 서로 안부를 궁금해 하고 있는데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의 해후는 서먹서먹했다. 서로 반가워하면서도 마음껏 붙들고 울지도 않았다. 하지만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표정 속에서 자매가 그동안 얼마나 서로를 그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C씨에게 필요한 것은 신원을 되찾는 것, 그래야 주거비지원도, 기초수급과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생이 도와주면 그 과정이 빨라질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매일 꽃길 같을 수는 없다. 여자가 된 후로 삶이 가시밭길이었지만 그것 역시 천성이고 운명이었으므로 괜찮다고 말하는 C씨. 이제는 어떤 길을 걷게 되든 가족과 함께 있어서 더는 외롭고 막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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