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전승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
발행일 2016.01.14. 11:34
옛말에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는다"는 말이 있다. 오동나무는 십수년 자라면 장롱을 짤 수 있는 재목이 되기 때문에 혼수해서 딸을 시집을 보내려는 것이고, 소나무는 60년쯤 자라면 관을 짤 수 있는 재목으로 자라기 때문에 죽으면 좋은 관에 들어가 집안의 융성을 도우라는 뜻이다.
소나무는 솔과 나무가 붙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솔은 수리 즉 으뜸을 뜻하므로 ‘나무중의 으뜸’이라는 말이다.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 ‘송(松)’을 살펴보면, 나무 木변에 벼슬을 뜻하는 公이 붙는다. 벼슬을 해도 좋을 나무라는 의미이다. 실제 속리산 입구에 세조가 벼슬을 내린 ‘정이품송’도 있다. 이러니 문화재 복원에 사용하기 위해 오래된 금강송 같은 나무를 벨 때는 제사도 지내고 “어명이요~”라고 외치기도 한다.
이순신이 전승할 수 있었던 이유
이렇듯 예부터 우리 민족과 밀접하게 연결된 소나무는 나라를 구하기도 했다.
때는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동래부의 다대포 앞바다에 왜군 700여 병선이 부산포에 나타난 것을 신호로 시작된 왜적의 조선침공은 불과 침공 하루 만에 부산성을, 4월 24일엔 상주를, 4월 30일엔 서울을, 개성과 평양은 60일도 채 되지 않아 함락시켰다.
조선군은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했을까. 패인에 여러 세부적인 요소가 있었겠지만, 그 핵심은 왜적의 신무기인 ‘조총(鳥銃)’에 있었다. 조선은 자국내전을 통해 숙련된 왜군의 조총부대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육군이 사용했던 각궁만으로는 자국 내에서 내전을 통해 잘 훈련된 왜군을 대적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육군과는 반대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연전연승을 해나갔다. 그리고 23전 23승이라는 전승신화를 만들어 냈다. 조선 수군의 승리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이순신의 탁월한 영도력만으로 모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소나무에 있었다. 승리의 비밀은 바로 조선 주력함선인 판옥선(板屋船)과 거북선(龜船)에 있었다.

판옥선 모형(좌), 광화문 지하 이순신이야기 전시관에 설치된 거북선 모형(우)
판옥선은 이순신의 거북선이 나오기 전인 1555년(명종10년)에 만들어 진 신형전투함으로 소나무와 나무못으로 만들어져 기동성이 높고 강한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조선군의 승리를 좌우했던 화포의 장착을 가능케 하였고 한 척에 20문 이상의 위력적인 화포를 탑재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해송(바닷가 소나무)을 송진에 먹여 건조시킨 목재 및 판자, 배 윗부분은 큰 판자를 덮어 칼과 송곳을 총총히 꽂아 왜군의 강점인 백병전을 철저히 막도록 설계된 것이다.
반면에 ‘아타케부네(安宅船)’라 불리는 일본 함선은 재질이 약한 삼나무와 쇠못으로 만들어져 내구성이 떨어졌다. 특히 해전에서 결정적인 무기인 화포의 강한 반동을 견딜 수 없어 기껏해야 2~3문 정도만 탑재할 수 있었으며 방향전환도 느렸다. 그보다 작은 ‘세키부네(關船)’와 같은 함선에는 속도는 빠르나 화포 장전이 아예 불가능했다. 이 화포의 장착 여부는 조선군과 왜군의 해전에서 승패를 좌우했다. 화포 장착이 불가능했던 일본 수군은 조총을 주력 무기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왜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승선전투전술(Boarding tactics)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일본 함선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철저하게 대비했고 조선 수군의 전략적 우세를 철저하게 활용했다. 그는 해전에서 철저하게 원거리 공격을 고집했다. 조총의 사거리가 50~100미터에 불과한 반면에 조선의 화포는 500미터에 달했기 때문이다. 해전에서 조총과 화포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줄기차게 원거리 공격을 하다 보니, 왜군의 강점인 백병전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수장(水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사용했던 학익진(鶴翼陣) 전법은 화포를 통한 원거리 공격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광화문 이순신동상(좌), 조선 수군이 거북선 안에서 함포사격 준비를 하는 모습(우)
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한 소나무
오래 살기 때문에 십상생중의 하나이며 출산이나 장을 담을 때 치는 금줄에 들어가는 재료이기도 한 소나무는 상쾌한 활력의 기운이 많기 때문에 큰 소나무 밑에 있으면 건강해진다고 믿어 왔다.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면서 땔감은 소나무와 솔가지로 하여 향기 좋은 솔 연기를 맡으며 살기도 했다. 소나무로 만든 송편과 송기떡을 먹으며 송화다식과 송엽주를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 선비들은 담장 안에는 매화, 대나무를 심고 밖에는 소나무를 심어 감상하며 소나무로부터 지조, 절개, 충절, 기상을 배웠다. 왕릉과 궁궐 주변에는 항상 좋은 기운이 에워싸도록 소나무를 많이 심게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우리 겨레는 이렇게 소나무와 같이 살다가 생을 떠나면 소나무관에 들어가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산에 묻었으니 이 어찌 나라의 나무, 민족의 나무, 겨레의 나무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남산 성곽길에서 본 소나무 숲. 마치 철갑을 두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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