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에 떠오른 그 남자의 숙제

최경

발행일 2015.12.03 15:40

수정일 2015.12.29 13:10

조회 518

어린왕자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2)

절체절명의 순간이 닥치면,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지나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고들 한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한때 나는 전국을 다니며 각종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119 구조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들이었다.

건물 공사장에서 일하던 이씨 할아버지는 건물 2층에서 떨어지면서 아래쪽에 세워져 있던 굵은 철근에 몸이 관통하는 엄청난 사고를 당했다. 왼쪽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철근이 목 오른쪽으로 삐져나온 상태였다. 119 구조대가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을 때, 그는 철근이 몸을 관통한 채로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몸에서 철근을 바로 빼낼 수 없다고 판단한 대원들은 일단 철근 아래쪽을 잘라내 곧바로 병원으로 내달렸다.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의사들도 이씨의 몸을 뚫은 철근을 빼내기가 힘들었다. 옆구리 쪽으로 철근을 잡아 빼려 해도, 또 반대쪽인 목 쪽으로 잡아 빼려 해도, 철근이 꿈쩍도 하지 않을뿐더러 자칫, 무리한 힘을 가했다가는 장기를 다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고를 당한 이씨 할아버지였다.

그는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부터 병원에 이송되는 전 과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119 대원들이 사고현장에서 의식이 있는지 확인할 때에도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똑똑하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엑스레이로 이씨의 몸을 촬영해보니, 철근이 기적처럼 모든 장기를 피해 순간적으로 관통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몸에서 철근을 어떻게 빼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결국 병원의 요청으로 119구조대가 이번에는 응급실로 다시 출동을 했다. 긴 철근을 한쪽으로 빼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의료진이 목 부분을 절개해 그 사이의 철근을 자르고 옆구리와 목 양쪽에서 철근을 잡아 빼기로 한 것이다. 굵은 철근을 자르려면, 119 구조대의 장비와 도움이 필요했다. 천신만고 끝에 철근을 반으로 자르는데 성공했고, 몸에서 철근을 빼낸 뒤 봉합수술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할아버지는 제작진의 카메라 앞에서도 당시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가 철근에 몸이 뚫린 채로 매달려 있던 그때,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올랐는지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할아버지도 지난 육십 평생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한꺼번에 휘리릭 머릿속을 지나가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이대로 내가 죽는다면 마음에 걸리는 숙제가 하나 있었노라고 말했다.

“내가 동네 금은방에서 외상으로 손주 돌반지를 샀거든요. 그걸 마누라한테 말을 안했어요. 공사장 일을 해서 외상값 갚으려고 그랬지요. 근데 이대로 죽으면 금은방에 빚진 걸 아무도 모를 거 아니에요. 그럼 금은방 주인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도둑놈이라고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참 큰일 났다... 마누라한테 얘기해 놓을 걸 싶었지요.”

의외였다. 어떻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에 외상값이 생각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외상값은 갚으셨나요?”

“갚았지요. 수술 받고 깨어났는데 목을 절개했으니 말을 할 수 없어서 필담으로 마누라한테 고백했어요. 금은방에 돈 갚아야 한다고요.”

어쩌면 그 순하고 선한 그 마음결 때문에 불행한 사고 가운데서도 이씨 할아버지에게 기적이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름지기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적은 나쁜 짓, 못된 짓 할 줄 모르는 사람들 곁에만 와줘야 마땅하다. 적어도 내가, 우리가 믿고 싶은 세상은 그렇지 아니한가.

#전문칼럼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