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는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다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5.01.06. 16:40

수정일 2015.11.17. 18:46

조회 6,223

토토가ⓒ뉴시스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78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 특집이 폭발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시청률이 10% 정도만 나와도 대박이라는 분위기에서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무려 22%에 달했고, 지상파 3사의 연말 특집 가요프로그램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큰 파급력이 나타났다.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90년대 노래들이 차트를 휩쓸고 있기도 하다.

<응답하라 1997>이 방영됐던 2012년 무렵부터 이미 90년대 복고가 인기를 끌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때의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2015년 벽두까지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 세대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90년대 콘텐츠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열기는 앞으로도 당분간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90년대에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렇게 오랫동안 인기를 끄는 것일까?

80년대 말에 '단군이래 최대 호황'이라던 3저 호황을 통해 한국은 배고픔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동시에 민주화 운동을 통해 군사독재로부터도 벗어났다. 그리하여 90년대는 자유와 풍요의 시대가 되었다. 젊은이들의 문화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젊은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칼라TV를 보며 서구문화에 익숙해진 세대였다. 나훈아, 남진, 이미자보다 마이클잭슨과 마돈나가 더 친숙한 세대였던 것이다. 이들이 한국 대중문화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 바로 1990년대였다.

당시엔 요즘처럼 대형기획사가 상품 제작하듯이 아이돌팀을 찍어내 발표하는 시대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하고도 역동적인 매력이 있었다. 1990년대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문화적 폭발이 있었는데, 그런 시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그 시절에 청춘을 보낸 중년 세대는 90년대 쇼를 보며 오래전 과거로 되돌아 간 듯 행복감을 느낀다. 다시 나타난 옛 가수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인간적인 감회에 젖기도 한다. 90년대 콘텐츠가 아직도 높이 평가받는 것을 보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젊은 세대는 90년대 쇼를 보며 추억을 되새기진 않지만, 새로우면서도 친숙한 매력을 느낀다. 새로운 느낌은 요즘 아이돌 음악과는 다르기 때문이고, 친숙한 것은 요즘 음악과 완전히 다르진 않기 때문이다.

90년대는 요즘 젊은 세대가 즐기는 문화의 태동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댄스음악 혁명이 터지면서 한국대중문화는 그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졌다. 그 이후 힙합의 원조인 듀스, 아이돌의 원조인 HOT, 걸그룹의 원조인 SES와 핑클 등이 등장했고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인터넷과 개인휴대통신을 활용하는 정보통신 신인류도 90년대에 등장했다. 트렌디 드라마의 원형인 <질투>, <사랑을 그대 품 안에>도 당시에 등장했고,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발점인 <쉬리>도 그때 나왔다.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인 개인주의나 소비주의도 90년대에 나타났다. 이렇게 90년대적 특징들이 2000년대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요즘 젊은 세대들도 90년대 복고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다.

보통 복고는 기성세대에게 '그때가 좋았지'라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회가 각박하고 경제가 불황일 때 사람들은 복고를 통해 위안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90년대는 일반적 복고의 향수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였다. 90년대엔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루고 자유와 풍요가 찾아왔는데 그때까진 아직 정리해고, 무한경쟁, 실업, 비정규직 등의 불안이 없었다. 90년대 말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은 미생이 을의 설움을 토로하는 불안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불안의 21세기를 10년 이상 겪은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90년대는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매력도 90년대가 지속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 중의 하나다. 지금의 사회가 너무나 각박하고 문화적으로도 다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90년대 열풍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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