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어야 할 정도의 가난은 죄악입니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11.07. 18:46

가난이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정도의 가난은, 그런 극빈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극빈자는 몽둥이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 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중에서 |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48
기나긴 수도권 전철을 타고 머나먼 길을 나섰을 때였다. 그 노선에는 유독 '잡상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구걸하는 '동냥아치'들이 많다. 이른바 부촌(富村)을 관통하는 운행 노선은 아니었다. 고만고만한 서민들의 동네와, 베드타운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빈촌(貧村)에 가까웠던 동네까지 두루 섞여 있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한 사람들>에서 말했던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오래된 고사가 더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시각장애인이 하모니카를 불며 지나간다. 주름살투성이의 사내가 잡동사니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끌고 들어와 쉰 목소리로 열차 안을 휘젓는다. 뒤축이 잔뜩 닳은 그의 낡은 구두는 비오는 날 대리석 바닥에서 미끄러지기 십상일 테다. 가난한 삶은 그처럼 평지에서도 살얼음판 위를 걷듯 위태롭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감하다. 나 역시 무심하고 무력하게 그들의 동냥그릇과 손수레를 지나쳤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살벌한 시대를 살아내다 보면 연민과 동정심마저 무뎌지기 마련이다. 외면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양심에 따르기 이전에 자기 마음 하나 지키기에 급급하니까.
그래서 새로운 '잡상인'들이 수레를 끌고 들어와 호객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여전히 보던 책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은 상태였다. 곁귀로 듣기에 그들은 부부인데, 남편은 지적장애인이고 아내는 지병이 있고 집에는 어린아이까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타인의 불행에 눈물을 흘리기보다 눈살이 찌푸리는 잔인한 세태에 익숙한 승객들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신을 한 집안의 남편이자 아버지라고 소개한 그가 더러운 전철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빌기 시작한 것이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저희 가족을 살려주세요!"
어느 작가의 에세이에선가, 그 당시엔 '각설이'라 부르던 걸인이 밥 때가 되어 대문을 두드리면, 그의 할머니는 바가지에 먹던 밥을 퍼주는 대신 마루 끝에 조촐하지만 정갈한 밥상을 차려주셨다고 한다. 어린 그가 걸인의 행색이 신기해 힐끔대며 쳐다보자 따끔하게 꾸지람하며, 비록 얻어먹는 밥이나마 마음 편하게 먹도록 배려해 주셨다는데... 스스로를 모욕할 수밖에 없는, 자존을 버릴 수밖에 없는 극빈을 눈앞에서 보는 심정은 참담했다. 겨우 세 자루에 천 원짜리 볼펜을 사주는 일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부끄럽고 무참했다. 무고한 이가 죄인을 자청할 때, 죄는 그를 방기한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 볼펜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나는 좀처럼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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