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맞아 버스정류장 찾아간 이유는?
발행일 2024.06.12. 14:58
영화 <암살>(2015년)의 극중 인물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이 영화 후반부에 경성 시내에서 일제 경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영화적 상상력일까? 전자에 가까운 듯하다.
종로5가역에서 대학로 방면으로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버스정류장 중에 ‘종로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정류소ID: 01-204)라는 이름의 정류장이 있다. 김상옥 의사, 그가 바로 홀로 1,000여 명(수백 명이라는 설도 있다)의 일제 군경과 3시간 넘게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을 벌이며 16명을 사상케 한 독립투사이다.
김상옥 의거(1923년)를 독립투쟁 역사의 맥락에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3.1운동(1919년)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사장 이종일은 민족대표 33인이기도 함)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29명(4명은 타 지역에 있어 미참석)에게 배부되면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현재, 옛 태화관 자리에는 표지석과 함께 3.1독립선언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있었고, 황해도 해주 출신의 기독교 지도자인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이후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서막이 올랐다(현재 탑골공원에는 3.1운동 기념부조를 비롯한 여러 기념물과 상징물이 있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3.1운동의 결과는 무장독립운동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의열(義烈) 투쟁도 그 중의 하나였다(서울역사박물관 전시실에는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일어난 여러 의열 투쟁의 연표가 잘 정리되어 있다).
1920년대 국내 의열 투쟁의 기폭제는 1919년 9월에 있었던 강우규 의사의 폭탄 의거였다. 평남 덕천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강우규 의사는 1919년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할 계획으로 국내에 들어와, 같은 해 9월 2일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에서 마차에 오르던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마차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여 총독은 무사하였지만 일경과 일본의 신문특파원 등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64세의 나이에 거행한 의거였기에 그 울림은 더욱 컸을 것이다(현재 옛 서울역사 앞에는 강우규 의사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21년 9월 김익상 의사는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하여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폭탄 2발을 투척하였고, 1발이 폭발하였다. 1923년에는 앞서 언급한 김상옥 의거가 있었다. 1922년 겨울 김상옥 의사는 권총과 실탄 등을 휴대하고 중국에서 경성으로 잠입하였다. 김상옥 의사는 이듬해 1월 12일 밤에, 일제의 대표적인 통치기구이자 독립운동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건물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일경의 추적을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따돌리며 여러 은신처에 피신해 있던 중, 1월 22일 새벽 종로구 효제동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수많은 일경에 포위 당한다. 양손에 권총을 쥔 채 여러 가옥을 넘나들며 일경과 3시간 넘게 치열한 총격전을 펼쳤고 최후의 1발이 남았을 때 자결하여 순국한다. 김상옥 의사의 몸에는 11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그 처절함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현재 종로구 서울YMCA 건물 옆쪽에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고, 효제동의 버스정류장 ‘종로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 근처는 김상옥 의사가 일경과의 총격전 끝에 순국한 장소이다. 또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26년 12월 28일에는 중국에서 경성으로 잠입한 나석주 의사가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수탈 기구인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당시 동양척식회사가 있던 지금의 을지로입구역 인근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앞에는 의거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함께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주위에서 보게 되는 많은 역사적 표지석과 동상을 무심결에 지나치기 쉽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수많은 희생을 잠시나마 기억해 보자. 참고로, 이 기사에 서술된 역사적 사실들은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발간한 <쉽게 읽는 서울史: 일제강점기편>,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의 자료, 그 외 기타 자료 등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종로5가역에서 대학로 방면으로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버스정류장 중에 ‘종로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정류소ID: 01-204)라는 이름의 정류장이 있다. 김상옥 의사, 그가 바로 홀로 1,000여 명(수백 명이라는 설도 있다)의 일제 군경과 3시간 넘게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을 벌이며 16명을 사상케 한 독립투사이다.
김상옥 의거(1923년)를 독립투쟁 역사의 맥락에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3.1운동(1919년)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사장 이종일은 민족대표 33인이기도 함)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29명(4명은 타 지역에 있어 미참석)에게 배부되면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현재, 옛 태화관 자리에는 표지석과 함께 3.1독립선언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있었고, 황해도 해주 출신의 기독교 지도자인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이후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서막이 올랐다(현재 탑골공원에는 3.1운동 기념부조를 비롯한 여러 기념물과 상징물이 있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3.1운동의 결과는 무장독립운동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의열(義烈) 투쟁도 그 중의 하나였다(서울역사박물관 전시실에는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일어난 여러 의열 투쟁의 연표가 잘 정리되어 있다).
1920년대 국내 의열 투쟁의 기폭제는 1919년 9월에 있었던 강우규 의사의 폭탄 의거였다. 평남 덕천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강우규 의사는 1919년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할 계획으로 국내에 들어와, 같은 해 9월 2일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에서 마차에 오르던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마차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여 총독은 무사하였지만 일경과 일본의 신문특파원 등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64세의 나이에 거행한 의거였기에 그 울림은 더욱 컸을 것이다(현재 옛 서울역사 앞에는 강우규 의사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21년 9월 김익상 의사는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하여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폭탄 2발을 투척하였고, 1발이 폭발하였다. 1923년에는 앞서 언급한 김상옥 의거가 있었다. 1922년 겨울 김상옥 의사는 권총과 실탄 등을 휴대하고 중국에서 경성으로 잠입하였다. 김상옥 의사는 이듬해 1월 12일 밤에, 일제의 대표적인 통치기구이자 독립운동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건물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일경의 추적을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따돌리며 여러 은신처에 피신해 있던 중, 1월 22일 새벽 종로구 효제동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수많은 일경에 포위 당한다. 양손에 권총을 쥔 채 여러 가옥을 넘나들며 일경과 3시간 넘게 치열한 총격전을 펼쳤고 최후의 1발이 남았을 때 자결하여 순국한다. 김상옥 의사의 몸에는 11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그 처절함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현재 종로구 서울YMCA 건물 옆쪽에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고, 효제동의 버스정류장 ‘종로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 근처는 김상옥 의사가 일경과의 총격전 끝에 순국한 장소이다. 또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26년 12월 28일에는 중국에서 경성으로 잠입한 나석주 의사가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수탈 기구인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당시 동양척식회사가 있던 지금의 을지로입구역 인근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앞에는 의거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함께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주위에서 보게 되는 많은 역사적 표지석과 동상을 무심결에 지나치기 쉽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수많은 희생을 잠시나마 기억해 보자. 참고로, 이 기사에 서술된 역사적 사실들은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발간한 <쉽게 읽는 서울史: 일제강점기편>,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의 자료, 그 외 기타 자료 등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효제동의 버스정류장 ‘종로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정류소ID: 01-204) 근처는 김상옥 의사가 일경과의 총격전 끝에 순국한 장소이다. ⓒ이정규
종로구 서울YMCA 건물 옆쪽에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정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 ⓒ이정규
서울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실 중 ‘일제강점기의 서울’에는 경성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과 여러 의열 투쟁의 연표가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정규
종로구의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에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 터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기념 조형물이 있다. ⓒ이정규
수송공원에는 독립선언서 인쇄라는 중책을 맡았던 보성사 사장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이종일 선생의 동상도 있다. ⓒ이정규
삼일독립선언이 거행되었던 옛 태화관 자리(현재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에 있는 표지석. 뒤편의 금속판 조형물에는 기미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다. ⓒ이정규
표지석 옆쪽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이정규
태화빌딩 앞에는 3.1독립선언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정규
3.1독립선언광장에는 독립선언서 돌기둥과 백두에서 한라로 흐르는 물길 등 다양한 상징물이 있다. ⓒ이정규
태화빌딩 로비에는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의 3.1독립선언을 묘사한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가 걸려 있다. ⓒ이정규
탑골공원에 있는 3.1운동 기념부조는 전국 각지의 3.1운동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정규
3.1운동 기념부조 중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 현장을 묘사한 작품 ⓒ이정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 ⓒ이정규
탑골공원에 있는 손병희 선생의 동상.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으로 3.1독립선언을 주도하였다. ⓒ이정규
서울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실 중 ‘일제강점기의 서울’에서는 3.1독립선언과 관련된 다양한 영상 콘텐츠가 상영된다. ⓒ이정규
옛 서울역사 앞에 있는 강우규 의사의 동상 ⓒ이정규
나석주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고 총격을 가한 동양척식회사 자리에는 의거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함께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정규
나석주 의사의 동상 ⓒ이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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