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맞아 돌아본 한강방어선 전투 이야기

시민기자 최용수

발행일 2024.06.07. 13:19

수정일 2024.06.0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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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사령관 모습 ©최용수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사령관 모습 ©최용수

“자네는 언제까지 이 참호 속에 있을 셈인가?”
“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상관의 철수 명령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북한군 남침 직후 맥아더 장군은 미군의 참전 결정에 앞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러 왔다. 이때 한 병사와 나눈 대화이다. "내가 동경으로 돌아가서 곧 지원 병력을 보내 줄테니 안심하고 싸우라"고 격려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날 맥아더 장군이 큰 감동을 받았고, 미군이 참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덧 74년이 흘렀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풍전등화 같았던 전쟁 초기, 당시 긴박했던 전황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적 장소가 있다면 한 번쯤 찾아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닐까? 지난 주말, 역사적 현장인 ‘한강전투(Battle of Han River, 漢江戰鬪)’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전사자 명비는 노들역 2번 출구를 나와 왼편에 있는 노들나루공원 안에 있다. ©최용수
전사자 명비는 노들역 2번 출구를 나와 왼편에 있는 노들나루공원 안에 있다. ©최용수

① 한강방어선 전투 영웅들의 혼이 서린 '전사자 명비'

지하철 9호선 노들역 2번 출구에서 40여 미터, 한강대교 남단 옛 노량진 배수장 자리에 노들나루공원이 있다. 아담한 크기의 공원, 중앙광장에서 남쪽을 보면 작은 태극기가 울타리 친 특별한 조형물이 있다.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이다. 중앙에 태극모양의 조형물과 뒤편에 국군(혼성 1, 2, 3, 7, 수도사단 및 김포지구 사령부)과 경찰 전사자 등 95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모습, 노들나루공원 남쪽 ©최용수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모습, 노들나루공원 남쪽 ©최용수

한강방어선 전투는 6.25전쟁 초기 수도 서울 함락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3개 혼성사단 및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한강 남쪽과 김포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 제1군단 예하 보병 4개 사단 및 전차 1개 여단의 한강도하를 6일간이나 저지시킨 전투를 말한다.

당시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한강방어선을 6일간이나 지탱해 북한군의 남진 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주었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는 등 6.25 전쟁사에서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1,000여 명이 새겨져 있다. ©최용수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1,000여 명이 새겨져 있다. ©최용수

② 미군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된 '맥아더 장군 시찰지'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1번 출구에서 2분 거리, 1998년 완공된 영등포공원이 있다. 꽃길 진입로와 깔때기를 엎어 놓은 모습의 커다란 조형물, 시원한 물을 뿜는 분수가 조화를 이루어 인상적이다.
영등포공원 안에 있는 OB맥주 공장 터 조형물 ©최용수
영등포공원 안에 있는 OB맥주 공장 터 조형물 ©최용수

영등포공원은 6만 1,544㎡ 규모로 옛 동양(OB)맥주 영등포공장이 있던 곳으로 OB 맥주가 경기도 이천시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서울시가 부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OB공원'으로도 불린다.

분수 연못 오른쪽 나무 계단길 옆에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 시설인 ‘맥아더 사령관 한강방어선 시찰지’ 안내 간판이 서있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인 맥아더 사령관 한강방어선 시찰지 안내판 ©최용수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인 맥아더 사령관 한강방어선 시찰지 안내판 ©최용수

6.25 전쟁 발발 직후, 미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미군의 참전 결정에 앞서 한강방어선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한다. 전쟁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전선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동양맥주공장(현 영등포공원)의 언덕에 올라 한강방어선을 살폈다. 이때 방어선의 한 병사가 “상관이 철수 명령을 내릴 때까지 지키겠다”는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미군 참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다.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방어선 시찰 언덕 아래는 영등포공원 분수가 설치되었다. ©최용수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방어선 시찰 언덕 아래는 영등포공원 분수가 설치되었다. ©최용수

③ 한강방어의 최전선 '백골부대 전적비'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한강 방어 백골부대 전적비이다.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마포대교 방향으로 40여 미터 오른쪽 여의도공원 방향, 3개의 깃발이 펄럭이는 곳에 전적비가 있다. 한강방어선 전투 백골부대 전적비 안내판과 비석,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이란 글과 전투 장면이 새겨진 석물이 용감히 산화한 호국 용사들의 충혼을 말해주고 있다.
한강방어 백골부대 전적비는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 2번 출구에서 4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최용수
한강방어 백골부대 전적비는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 2번 출구에서 4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최용수

이 전적비는 2003년 10월 백골전우회가 장병들의 전공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양화인공폭포공원에 처음 비를 세웠으나, 월드컵대교 건설로 이전할 상황을 맞았다. 이에 2020년 6월, 실제 전쟁터였던 현 여의도로 이전하게 되었다. 
한강방어선 전투 백골부대 전적비, 실제 전투를 했던 장소인 현 위치로 이전했다.  ©최용수
한강방어선 전투 백골부대 전적비, 실제 전투를 했던 장소인 현 위치로 이전했다. ©최용수

6.25 전쟁이 발발한 3일 후인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자 삼각지에 주둔했던 제18연대 1대대 병력은 양화교~여의도를 연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 장비와 수적 열세에도 7일 동안 영등포 북단(여의도)를 사수하고 북괴군의 도하를 저지하면서 적 300명의 수장시키는 등 전공을 세운다. 마침내 적이 영등포를 점령하자 포위망을 뚫고 7월 4일 시흥으로 탈출(70명)한다. 
평화로운 여의도공원 모습도 호국영령들의 헌신 덕분이다. ©최용수
평화로운 여의도공원 모습도 호국영령들의 헌신 덕분이다. ©최용수

제18연대를 백골부대로 부르게 된 것은 월남 후 입대한 서북청년회 출신 병사들이 "죽어 백골이 되더라도 끝까지 싸워 고향 땅을 되찾겠다"며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었고, 마침내 이것이 연대 내에 퍼져 지금의 별칭이 되었다고 한다.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 구호와 전투 장면을 새긴 부조 및 전적 비석 ©최용수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 구호와 전투 장면을 새긴 부조 및 전적 비석 ©최용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처참했던 동족상잔의 비극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되어간다. 호국보훈의 달에 뜻깊은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한강방어선 전적지를 추천한다. 모두 도심 공원에 있으니 공원 나들이와 함께 둘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영등포공원

○ 위치 : 서울 영등포구 신길로 275
○ 문의 : 02-2670-3717

노들나루공원

○ 위치 :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로 247 

여의도공원

○ 위치 :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공원로 68 
○ 문의 : 02-761-4079

시민기자 최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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