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의 화룡점정…명판에 무엇을 새겨야 오래 기억될까?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3.09.01. 14:47

수정일 2023.09.01. 14:47

조회 1,254

지정우건축가
2020년 새롭게 단장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에는 리모델링 된 취지, 만드는데 참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졌다.
2020년 새롭게 단장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에는 리모델링 된 취지, 만드는데 참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졌다.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13) 공간에 새겨 넣어야 할 것

사람이 다 각기 다른 이름이 있는 것처럼 공간도 이름이 있다. 건축뿐만 아니라 도시의 길, 공원, 놀이터 등 모든 장소에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단지 지도와 서류상에 표현되는 행정절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만든 사람의 노력 혹은 역사가 그 배경에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미시간 주립대학교 내의 Eli and Edythe Broad Art Museum의 건축 명판과 건물전경.
미시간 주립대학교 내의 Eli and Edythe Broad Art Museum의 건축 명판과 건물전경.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한 뮤지엄에 들렀다. 여느 건물처럼 그곳 입구에는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명판이 걸려있다. 건축의 이름과 소속, 담당한 위원회의 위원들과 위원장 같은 흔한 정보 뿐만 아니라 이 건축을 설계한 건축회사, 협력 건축회사, 시공회사 등의 당연한 정보들도 날짜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명판은 삐딱하다. 완전한 평행 사변형도 아니고 양쪽 변의 기울기도 다른 사각형이다. 뮤지엄 건축과 그 형태가 닮아 있음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신시내티 컨트리 데이스쿨의 건축 명판.
신시내티 컨트리 데이스쿨의 건축 명판.

뮤지엄과 같은 문화공간에만 이런 명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초중고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건축에도 당연히 건축 명판이 걸려있다. 미국 신시내티의 한 학교에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무래도 학교 건축이다 보니 관여한 졸업생이나 위원회, 모금을 위해서 애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컨설팅, 건축설계회사, 시공회사 이름들과 같이 쓰여있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First Unitarian Meeting Society교회 앞의 조경 석재에 새겨진 명판과 건축가 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First Unitarian Meeting Society 교회 앞의 조경 석재에 새겨진 명판과 건축가 직인.

이러한 건축 명판은 현대의 건축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 위스콘신주 메디슨시의 1951년 완공된 유니테리언 교회(First Unitarian Society)에는 유니테리언 집회소(Unitarian Meeting House)가 있는데, 이는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등 많은 훌륭한 건축을 설계한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건축이다. 

이 집회소 또한 놀라운 공간감과 기하학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공간 형태, 독특한 재료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2004년 국립 역사적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명판이 건물 외부에 단단히 박혀 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입구 기둥의 한 돌에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정사각형 음각이 되어있는데 이는 건축가 자신의 이니셜을 이용한 서명이다. 서류에 사인하듯, 건축 자체에 넣은 것이다. 
신시내티 마운트 아담스 지역의 계단 앞에 놓인 안내 지도.
신시내티 마운트 아담스 지역의 계단 앞에 놓인 안내 지도.

길이나, 광장, 계단과 같은 도시적 공공장소의 경우, 역사 등을 써넣은 안내판을 세우는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질 수 있기에 쉽게 닳거나 파손되어 있는 채로 방치되기 쉬운데 아예 돌에 새겨 넣거나 단단한 금속으로 주물을 떠서 만들어 놓는다면 그 장소의 역사를 전하는데 더욱 어울릴 것이다. 글과 사진 같은 평면적인 정보뿐 아니라 아예 입체 지도를 새겨서 놓는다면 시각, 촉각을 모두 사용하여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각인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놀이풍경 벤치 역할을 하는 조경석의 옆면에는 이 공원에 기증한 시민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놀이풍경 벤치 역할을 하는 조경석의 옆면에는 이 공원에 기증한 시민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신시내티 Heekin Family 모험놀이 풍경에는 다양한 놀이 요소들이 있다. 규칙과 안전규정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여러 장소에 세워져 있는 것은 우리의 놀이터와 다르지 않다. 

조금만 시선을 낮춰보면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특별한 벤치를 만든 아티스트의 이름이나 공원을 만드는 데 참여한 시민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사람의 이름이 각인된 단단한 돌 벤치는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 같다. 어린 친구들은 그것을 만지며 놀 것이고, 그때의 놀이풍경을 유년의 기억에 각인할 것이다. 정확하게 이름을 적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겠다.  
아틀란타의 플레이스케이프 (Playscapes) 명판과 예술가 이사무 노구치에 대한 안내판, 그리고 놀이풍경 전경.
아틀란타의 플레이스케이프 (Playscapes) 명판과 예술가 이사무 노구치에 대한 안내판, 그리고 놀이풍경 전경.

1976년에 예술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에 의해서 만들어져서 현재까지 어린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즐겁게 뛰노는 애틀랜타의 ‘플레이스케이프’ 놀이풍경은 20주년이 되던 해에 다시 보수를 거쳐 재오픈 되었다. 그 보수를 위해 참여한 기업들과 의미를 기록한 명판, 이사무 노구치에 대한 안내판이 있어서 이곳을 찾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관심있게 보곤 한다. 이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잠재적으로 움직이는 무엇을 전하는 것 같다. 
EUS+Architects가 설계한 배봉초등학교 ‘놀이키움터’의 안내판.
EUS+Architects가 설계한 배봉초등학교 ‘놀이키움터’의 안내판.

우리나라의 놀이터에도 ‘안전수칙’이나 안전인증 같은 것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표기돼 있거나 알루미늄 판으로 만들어 시간이 지난 후 벗겨진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필자가 속한 건축 사무실에서는 어린이 놀이풍경을 설계할 때 정성을 담아 안내판을 디자인하고 세우려 노력한다. 서울시 교육청의 ‘꿈을 담은 놀이터’ 중 배봉초에 설계한 놀이풍경은 그 이름을 학교 교육 지향점에서 나타난 ‘키움’이라는 단어를 붙여 ‘놀이키움터’라 짓게 되었다. 그 의미와 함께 정확하고 간결한 안전 수칙을 기재하였고, ‘참여 구상 워크숍’으로 함께 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다. 참여 학생들의 이름이 쓰여있는 것을 보며 학생들은 더욱 애착과 자주성을 갖게 될 것이다. 
EUS+Architects가 설계한 전주시립도서관 내 ‘우주로1216’의 책장 겸 명판, 과정의 타임테이블.
EUS+Architects가 설계한 전주시립도서관 내 ‘우주로1216’의 책장 겸 명판, 과정의 타임테이블.

실내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만드는 손길과 노력이 덜하지 않다. 2019년 말에 완성한 트윈세대(12-16세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 전용공간인 ‘우주로 1216’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만나는 특별한 책장이 있다. 이 책장은 전주 시내 가로 지도의 모습을 단순화하여 디자인한 것으로 중심이 되는 세로와 가로 축에 각각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기획 단계부터 공사 완성까지의 순간이 타임테이블로 쓰여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설계한 건축가, 공사 책임자, 전기 공사, 마감 공사 등 시공 각 단계에 참여한 손길들뿐만 아니라, 기획, 리서치, 마케팅, 자금, 공무 등의 지원을 한 모든 주체들을 회사나 대표자 이름만이 아닌 한 명 한 명 실명으로 적었다. 또한 이런 전문가들과 같이 참여 워크숍을 한 트윈세대 각각의 이름도 영원히 남게 되었다.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가 전하는 공간의 의미도 글로 표현되어 새겨졌다. 

이러한 정확한 이름의 표현과 과정의 기록을 통해 모두의 노력으로 만들어졌음을 전달하고, 모든 참여 주체와 순간이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음세대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 장소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도 모든 공간들을 정성스럽게 만든 만큼 그 공간의 기록과 메시지가 새겨지는 노력이 이어지길 바란다.  
이 공원 내 벤치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이 그를 기억하며 기증한 것이다. 작은 금속 명판에 간략하게 적혀 붙어있다.
이 공원 내 벤치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이 그를 기억하며 기증한 것이다. 등받이 작은 금속 명판에 간략하게 적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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