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로 내 마음 전하는 소원 성취했어" 여든 어르신의 한글공부

시민기자 윤혜숙

발행일 2021.10.21. 15:24

수정일 2021.10.21. 17:11

조회 4,001

‘2021 서울문해교육 시화전’ 서울특별시장상 박영자 어르신을 만나다
2021 서울문해교육 시화전 수상작 박영자 어르신의 '어머니 전상서'
2021 서울문해교육 시화전 수상작 박영자 어르신의 '어머니 전상서' ⓒ서울특별시문해교육센터

유네스코가 정한 ‘문해의 달’ 행사의 하나로 '2021년 서울지역 문해교육 시화전'이 열리고 있다. 배우지 못한 아픔을 갖고 있던 어르신들이 서울시 문해교육 학습 이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인생을 담은 시화전이다.

온라인 전시관(slec.kr)으로 접속해서 시화전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위의 시에 눈길이 머물렀다. 문득 필자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늘 무학의 설움을 토로하면서 필자를 비롯한 어린 손주들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던 분이셨다. ‘어머니 전상서’를 써 서울특별시장상을 수상한 박영자 어르신의 작품을 읽는 동안 할머니가 교차되면서 필자를 과거로 이끌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준 박영자 어르신을 만나 뵙고 ‘어머니 전상서’를 쓰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박영자 어르신이 복지관에서 성인문해교육을 수강하고 있다.
박영자 어르신이 복지관에서 성인문해교육을 수강하고 있다. ⓒ윤혜숙
어머니, 내가 한글을 15년을 공부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트로트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영탁이 노래 가사를 읽을 수 있어요. 

박영자 어르신(80세)이 한글을 배우고 있는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했다. 마침 어르신이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성인문해교육을 수강 중이었다. 어르신은 15년 전부터 이곳에서 한글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오늘은 또래의 어르신들과 함께 한글로 편지 쓰기를 하는 날이다. 어르신들이 차례대로 자신이 쓴 편지를 읽은 뒤 강사가 어르신의 편지를 첨삭하면서 보완해야 할 점 등을 알려주었다.
  
박영자 어르신에게 서울특별시장상을 받은 소감을 여쭤봤다. 어르신은 “내 나이 80살에 큰 상을 받았어요. 다 복지관 선생님들 덕분이에요. 한글을 배울 적에 선생님들이 참말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라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르신은 초등학교를 3개월 다니다 그만둬야만 했다. 당시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맏딸로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기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다. 8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어르신만 초등학교 중퇴다. 하지만 공부하는 동생들 틈에서 어깨 너머로 익혀서 떠듬떠듬 쉬운 글자 위주로 한글을 읽을 수는 있었다.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에서 성인문해교육을 받고 있는 어르신들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에서 성인문해교육을 받고 있는 어르신들 ⓒ윤혜숙
글자를 알게 된 박영자 어르신은 손글씨로 편지를 쓰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글자를 알게 된 박영자 어르신은 손글씨로 편지를 쓰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윤혜숙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아 키우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다 20년 전 손주를 돌봐줄 때 손주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학습지 교사가 어르신 댁을 방문했다. 마음 같아선 손주들 틈에서 같이 한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그땐 용기가 나지 않아서 머뭇거리다 말았다. 

어느 날 관악신문에서 복지관 소식을 봤다. 복지관에서 한글 수업이 있어서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손주를 돌보는 상황이어서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손주들을 키우고 나서야 어르신은 마침내 복지관을 방문해서 한글 수업을 수강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상서'에서도 밝혔 듯 그 때가 어르신 연세 65세였다. 

어르신은 글을 쓰지 못하니까 은행 등의 기관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 난처했다. 직원에게 부탁해서 대신 적어달라고 했던 적이 많았다. 이때 어르신은 한글을 익혀서 누구에게든 내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쓰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어르신이 한글을 읽고 쓰는 게 자유로워진 지금은 어떨까?

4년 전부터 어르신은 손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르신은 자녀나 손주의 생일이 다가오면 손글씨로 ‘생일 축하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라’는 덕담을 적어준다. 또 지인들의 결혼식에 가면서 ‘축 결혼’이라고 적은 축의금 봉투를 전한다.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긴 어르신은 고생하신 어머니께 감사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8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어머니께 맛난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박영자 어르신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영자 어르신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
글을 배우니 이제 내 이야기 밥 짓듯 지을 수 있어요.
어머니가 낳아준 내 손 하나도 안 부끄러워요.
한글을 알았는데 내가 참말로 좋아졌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르신은 배고픈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과 시장을 오가면서 동동거리며 생활했던 어머니는 음식이 생겨도 자녀들에게 주느라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나는 괜찮다. 너희 먹어라”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는 어르신.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사정상 초등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맏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되면서 더욱 어머니가 그리웠다.  

박영자 어르신은 “요즘 손편지를 쓰는 사람이 드물지. 바빠서 간편해진 세상이지만 그래도 정성을 들여서 손편지를 쓴다면 받는 사람에게도 그 의미가 오래 남을 텐데…”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한다. 아직 한글을 배우지 못한 어르신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요즘은 백세시대잖아요. 지금 바로 집 주변에 있는 복지관에서 상담부터 알아보세요”라고 말한다. 
박영자 어르신이 2021 서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서울특별시장상을 받았다.
박영자 어르신이 2021 서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서울특별시장상을 받았다.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

어르신은 한글을 읽고 쓰게 되면서 좋아하는 트로트 가사를 읽어보고 좋아하는 가수에게 팬레터도 쓸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을 익히지 못해 그동안 불편하게 살아왔다면, 한글을 배워서 남은 인생은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어르신의 말은 어르신 자신에게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서울에는 곳곳에 문해교육기관이 있다. 어릴 적 가난과 차별 등으로 제때 학교에 다니지 못해서 한글을 습득할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이 집 주변의 복지관 등에서 한글을 배울 수 있다.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에서 서울 시내에 소재한 문해교육기관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을 배우고 싶은데 주저하고 있다면 박영자 어르신처럼 집 근처에 있는 문해교육기관에서 한글 수업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시작이 반이지 않은가.
'2021 서울문해교육 시화전'이 온라인에서 열리고 있다.
'2021 서울문해교육 시화전'이 온라인에서 열리고 있다. ⓒ서울특별시문해교육센터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은 ‘세월로 쓰고 마음으로 그린, 시와 그림 이야기’라는 주제로 시화전 작품을 공모했다. 코로나19와 사회적 거리두기 장기화로 문해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학습자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지난해 111점보다 올해 훨씬 많은 작품인 190점이 접수됐다. 이 가운데 심사를 거쳐 40개의 수상작이 선정된 것이다.

40명의 문해 학습자들이 배움 속에서 찾은 인생의 희망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낸 '2021년 서울지역 문해교육 시화전’은 온라인 전시관(slec.kr)에서 감상할 수 있다.

시민기자 윤혜숙

시와 에세이를 쓰는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다양한 현장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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