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도 깜짝 놀랐다! 공평동 항아리 속 한글 금속활자의 의미는?

시민기자 박은영

발행일 2021.10.05. 14:20

수정일 2021.10.05. 14:21

조회 2,311

무릎을 구부려 앉은 자세로 연신 흙을 파낸다. 호미를 잡은 손끝은 빠르지만 조심스러웠다. 땅 속에서 무언가 드러나면 한쪽으로 분류, 다시 땅을 흩는다. 옆에서 그 모습을 주시하는 연구원들의 시선 역시 신중하다. 땅에서 나온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려지지 않는 이곳은 공평구역 제15·16지구 유적 발굴 조사 현장이다. 금속활자 1,600여 개와 세종시대의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와 물시계의 부속품 '주전', 총통 8점과 동종 1점의 금속 유물이 발견된 장소 말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그 현장을 찾았다.
문화재 발굴 작업 중인 어르신들
문화재 발굴 작업 중인 어르신들 Ⓒ박은영

종로2가  YMCA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 골목으로 이동하니 바로 공사현장이 보였다. 도로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장소였다. 문화재가 발굴된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파란색 비닐로 덮은 땅(이미 작업을 끝낸 지점) 사이로 파헤친 구덩이들이 보인다. 그 사이를 오가는 이들과 쭈그려 앉아 발굴 작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 3월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지금도 조사 중에 있고, 현재는 15세기 문화제 세부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맨 처음 시굴조사를 시행하고 문화층이 몇 개인지 확인한다. 크게 조선 전기, 중기, 후기, 근대 이렇게 네 개의 문화층이 나왔다고 판단을 하면 그곳 면적에 따라 발굴조사가 진행된다. 지난 금속활자 등의 문화재 발굴에는 15명 정도의 어르신과 4명의 연구원이 함께 했다.” 수도문물연구원 현장조사팀장 양현모 씨 얘기다. 양 팀장은 금속활자를 처음 발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때 기분이나 또 그 순간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했다.
수도문물연구원 양현모 조사팀장
수도문물연구원 양현모 현장조사팀장 Ⓒ박은영
연구원이 문화재 발굴 작업 중 조사를 진행하는 모습
연구원이 문화재 발굴 작업 중 조사를 진행하는 모습 Ⓒ박은영

“금속활자 발굴 당시에도 다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맨 처음 총통이 절단된 상태로 먼저 확인이 됐다. 이런 종류는 서울 일대에서 확인이 되고는 하는데, 일단 총통이 발견되면서 더 꼼꼼히 조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총통 옆에서 둥그런 금속 소재 유물이 출토되면서 일부 면이 깨져 있는 항아리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가 금속활자의 선구자이고 앞선 기술을 지녔다는 기록은 있지만 실체가 없었다. 책으로만 확인했던 내용을 실체로 확인하고 우수성 또한 증명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될 수 있으니 그 의미가 크다. 금속활자의 개발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100대 사건 중 1위를 기록할 만큼 대단한 의미이다.” 

양현모 팀장은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는 금속활자와 더불어, 기록으로만 전해졌던 과학기술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천문시계 '일성정시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일성정시의'에도 애착이 간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별을 볼 수 있는 시계로 세종 때 4점만 제작됐다고 기록됐는데, 이곳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만큼 특별하다. 최초 발견이고 기록에 나와 있는 모습 그대로 확인이 가능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게 뭔지 몰라서 전공 교수님을 모시고 자문을 구했다. 그 분이 일성정시의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연구한 영국 학자가 쓴 책을 보여주면서 외국 교수가 우리나라 천문시계의 우수성을 이미 인정했다고 했을 때,  감명 받았다.” 

출토된 금속활자 중에서는 한문으로 된 금속활자와 한글 금속활자가 있고, 이들은 1434년과 1460년대로 전해지고 있다. 여러 시대의 귀한 유물이 항아리에 보관됐다는 점이 좀 색다르다.  
금속활자와 일성정시의 등의 유물이 발굴된 현장
금속활자와 일성정시의 등의 유물이 발굴된 현장 Ⓒ박은영
일성정시의 및 동종 출토 당시 모습
일성정시의 및 동종 출토 당시 모습 Ⓒ문화재청

“유물 발굴 장소는 조선시대 중심가로 한성부 견평방에 해당한다. 행정 구역의 일부로 경복궁 바로 오른편에 있으니 상당히 중심가다. 묻힌 곳은 불을 땐 흔적이나 온돌 같은 난방장치가 확인되지 않아 창고로 추정된다. 유물 중 총통에는 날짜가 1588년이라는 제작년도가 있다. 그 이후에 보관됐고,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임진왜란이 있었기 때문에 전시 대비로 숨겨 놓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총통과 동종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은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항아리에서 발굴된 금속활자들 (문화재청)
항아리에서 발굴된 금속활자들 Ⓒ문화재청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문화재청)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문화재청

전문가에게 물었다! 조선 전기 시대 한글 금속활자 최초 발견의 의미는?

한글활자와 한문활자가 한꺼번에 발굴된 것은 최초라고 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이승철연구원과 전화인터뷰를 통해 더 알아봤다.

Q. 발굴된 유물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로, 다양한 활자가 한 곳에서 발굴된 첫 사례다.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전기 활자가 발굴을 통해서 다량으로 출토된 것은 최초의 사례이다. 조선 후기 활자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에 많이 남아있는데 전기 활자의 경우는 보고된 사례가 없다. 일부 을해자(1455년 제작 활자) 20여 자 정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보고되지만 다른 종류의 활자들과 섞여 있다 확인이 된 거고, 이렇게 출토된 유물 중 갑인자(1434년 제작 활자)와 을해자가 같이 발굴된 예는 최초의 사례라고 보면 된다.”

Q. 발굴된 금속활자 중에는 조선 전기 세종 시대의 금속활자인 갑인자로 추정하는 활자도 발견됐다던데?

“발굴된 한글 활자 중에는 큰 자도 있고, 작은 자도 있다. 특히 큰 자의 경우 최초로 보고된 사례라고 보면 된다. 일반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세종 당시의 한글 활자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세종이 살아 계실 때 주조하게 해서 사용한 활자는 아니라는 거다. 책 <월인천강지곡>이나 <석보상절>이 세종 때 만들어진 한글 활자로 인쇄한 책인데 그거와는 활자가 조금 다르다. 그래서 그 이후인 세조 때 만들어진 활자일 것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다. 정확한 고증을 거쳐야 하겠지만 학계에서는 세조 때 주조돼 1550~60년대 사용했던 활자일 것이라고 본다. 일부는 1580~90년대 사용했던 경서자 한글 활자와도 유사한 것 같다.”
물시계의 부속품인 주전(문화재청)
물시계의 부속품인 주전 Ⓒ문화재청
승자총통(문화재청)
승자총통 Ⓒ문화재청

Q. 발굴된 금속활자 중에는 인쇄본으로 있지만 활자로 발견된 것은 최초인 동국정운식 표기의 실물 활자도 포함됐다고 들었다. 동국정운식 표기라는 말이 낯설고 생소하다.

“‘동국정운식 표기’라는 말은 그 당시 중국 한자를 쓰는 백성들에게 중국의 한자음을 우리말로 잘 표기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활자다.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했지만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힌 세종은 중국의 한자음이 어려우니 우리말로 잘 표기하기 위해서 만든 활자라고 설득을 한다. 하지만, 동국정운식 표기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30~40년 동안만 사용된다. 이유는 훈민정음이 일반 백성들에게 퍼지니 중국한자를 표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종시대 만들어진 동국정운식 표기의 활자가 처음으로 발견됐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Q. 지난 6월 최초 발견 이래 금속활자의 분석과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이 있는지? 또, 출토된 금속활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앞으로 과제는 무엇인가.

“이게 출토 유물이고 출토 과정이 드러났기 때문에 당연히 인정을 받는 유물이다. 분석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금속활자 발굴 후 1차 세척을 거치고 난 다음 고궁박물관으로 이동해서 보관하고 있고, 아직 연구자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한다. 유물의 훼손 우려나 여러 가지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획은 이렇다. 올해 종로 지역 발굴이 종료 되면 전체적으로 출토된 유물에 관한 보고서가 나올 거다. 보고서가 나올 때 활자와 관련해서 추가적인 세척이 진행된다. 세척이 진행된 다음에 그 활자가 어떤 활자들인지 정밀한 이미지를 확보한 후 관련 학회와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될 것이다. 앞으로 1~2년 정도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의 시굴현장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의 시굴현장 Ⓒ박은영

세계적인 우리의 기술은 땅 속 깊이 단단하게 자리하던 1,600여 개의 금속활자로 구체적인 형체를 드러냈다. 어려운 말들이 많아 공부가 필요했지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말의 근본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느낌이었다. 공평동 유적지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는 고갈비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던 피맛골의 추억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이제 이곳엔 국내 최대 규모의 유적 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제 연구와 분석을 거쳐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때다.

시민기자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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