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예장공원에 가면 들러야 할 곳! 이회영 기념관에 가다
발행일 2021.06.22. 13:00
2016년 국가보훈처 국외사적지 탐방으로 중국의 시안과 낙양, 베이징 일대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했었다. 중국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찾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베이징 일대.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이 3·1운동 후 거주했던 골목이었다.
당시 해설로 담당했던 한국사 교수는 이회영 선생을 이렇게 설명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이다. 이는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해진 프랑스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당시 해설로 담당했던 한국사 교수는 이회영 선생을 이렇게 설명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이다. 이는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해진 프랑스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남산예장공원과 우당 이회영 기념관 ⓒ조수연
우당 이회영은 부와 권력과 명성에 맞는 사회적 책임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었다. 그의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팔아 만주 삼원보에 신흥학교를 설립했다. 급하게 처분한 재산만 하더라도 현재 천억 원 넘는 금액에 달했다. 이 모든 돈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회영은 독립을 보지 못하고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에 따른 후유증 때문이었다. 최근 서울시는 12년간 진행됐던 남산예장공원 사업을 마무리하고 정식 개장했는데, 지하에 이회영 기념관을 조성했다.
하지만 이회영은 독립을 보지 못하고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에 따른 후유증 때문이었다. 최근 서울시는 12년간 진행됐던 남산예장공원 사업을 마무리하고 정식 개장했는데, 지하에 이회영 기념관을 조성했다.
이회영 기념관 입구 ⓒ조수연
지난 주말, 새로 개관한 이회영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회영 기념관은 남산예장공원 지하 1층 버스환승센터 옆에 위치했는데 이회영 선생의 모습을 보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QR코드 체크인을 마친 뒤 기념관 내부를 돌아봤다.
기념관에서는 먼저 이회영과 신민회를 다뤘다. 신민회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조직된 비밀결사단체로 이회영과 동지들은 쌍회정 아래 상동교회를 거점으로 전덕기와 김진호, 이용태, 이동녕 등과 결성했다. 신민회는 역사책에서 자주 언급될 정도로 독립을 위해 힘쓴 단체인데, 헤이그 밀사 사건과 해외독립운동기지 결성, 국내애국계몽운동 등을 벌였다.
기념관에서는 먼저 이회영과 신민회를 다뤘다. 신민회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조직된 비밀결사단체로 이회영과 동지들은 쌍회정 아래 상동교회를 거점으로 전덕기와 김진호, 이용태, 이동녕 등과 결성했다. 신민회는 역사책에서 자주 언급될 정도로 독립을 위해 힘쓴 단체인데, 헤이그 밀사 사건과 해외독립운동기지 결성, 국내애국계몽운동 등을 벌였다.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생활 기록은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서간도시종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수연
다음으로, 신민회가 만주 삼원보에 세웠던 비밀결사단체인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설명했다. 이회영과 6형제는 서간도에 터를 잡자마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경학은 밭을 갈면서 공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무장독립투쟁의 근거지가 되는데,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을 길러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이회영과 6형제가 없었다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도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 셈이다.
특히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이회영과 6형제가 없었다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도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 셈이다.
개관 특별전 '봉오동으로 가자 청산리가 되자' ⓒ조수연
이러한 내용은 이회영 기념관 개관 특별전인 ‘봉오동으로 가자, 청산리가 되자’에서 자세히 만날 수 있다. 1920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 원년이며, 정부를 세운 지 2년차를 맞는 해였다. 여러 독립운동 세력은 독립전쟁을 위해 무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는 어디서 구했을까? '체코무기 특별전'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해결할 수 있다. 독립운동에 사용한 무기는 1차 세계대전 과정에 유럽 동부전선에서 기차로 이동, 블라디보스톡 항에서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체코 군단에게서 얻었던 것들이 상당수다. 체코인에게서 소총 1,200여 정과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권총, 수류탄 등을 구매했는데, 구매 대금은 돈이나 금붙이뿐 아니라 여인네들이 뽑아 바친 비녀, 은가락지 등도 포함됐다. 독립운동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는 어디서 구했을까? '체코무기 특별전'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해결할 수 있다. 독립운동에 사용한 무기는 1차 세계대전 과정에 유럽 동부전선에서 기차로 이동, 블라디보스톡 항에서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체코 군단에게서 얻었던 것들이 상당수다. 체코인에게서 소총 1,200여 정과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권총, 수류탄 등을 구매했는데, 구매 대금은 돈이나 금붙이뿐 아니라 여인네들이 뽑아 바친 비녀, 은가락지 등도 포함됐다. 독립운동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던 셈이다.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모신나강 소총 ⓒ조수연
이회영과 6형제는 독립운동으로 모든 돈을 소진해 말년은 매우 가난하게 보냈다. 일부 형제는 아사(餓死)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가난하기는 이회영도 마찬가지였는데, 이회영의 낙관(落款)으로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이회영은 긴 망명생활 동안 배고픔을 이기고자 피리를 불고 묵란을 쳐서 항일운동자금을 구하곤 했는데, 돌을 깎고, 글자를 일으켜 도장을 찍고 다녔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도장 ⓒ조수연
그 외에 기념관은 이회영의 말년의 독립운동과 남은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서 광복을 봤던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소개, 이회영의 독립운동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회영 가문이 남긴 남산 자락에 남긴 흔적과 기록은 여럿이다. 그들이 남산을 포함한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은 지 110년 만에 이회영 기념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신흥무관학교 개교일인 6월 10일 문을 열고 남산예장공원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회영 가문이 남긴 남산 자락에 남긴 흔적과 기록은 여럿이다. 그들이 남산을 포함한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은 지 110년 만에 이회영 기념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신흥무관학교 개교일인 6월 10일 문을 열고 남산예장공원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기념관 전경 ⓒ조수연
남산 예장 자락에 복원된 남산예장공원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이회영 기념관을 들러보자.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몸소 보여주고, 가문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 그 자체를 만날 수 있다.
■ 이회영기념관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6길 36
○ 운영시간: 화~일 10:00~18:00(매주 월요일, 설날·추석연휴 휴관)
○ 문의: 02-755-0610
○ 운영시간: 화~일 10:00~18:00(매주 월요일, 설날·추석연휴 휴관)
○ 문의: 02-75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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