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도장도 이 손으로 새겼어요"
발행일 2011.06.21. 00:00
54년 인장경력을 가진 창신동 인장골목의 산증인 유태흥(71) 씨를 만났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4번 출구 신설동 방면으로 나오면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걸어가기 불편할 정도로 복잡한 거리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면 한 건물 지하 1층에 그의 사무실이 있다. 한 19.83㎡(6평) 남짓, 아주 작은 공간이다.
창신동 인장골목은 1960년대부터 인장 만드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면서 1990년대에는 70여 개 점포가 늘어서기도 했다. 지금은 30여 개 인장가게가 인쇄소, 문구점과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장기술은 선배 어깨 너머로 배워왔으나 요즘은 배우려는 젊은이가 드물다. 그래서 인장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60대 이상 고령자들이다.
빨간 넥타이의 노인이 밝은 전등 밑에서 돋보기를 쓰고 인장을 새기고 있었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 유태흥 씨다. 그의 옆에는 한국 인장업연합회 공모전(2009년)에서 각인부 금상을 받은 제자 장호준씨가 앉아있다. 유태흥 씨에게 “사무실이 좀 좁네요”라고 말을 건냈다. “하하, 이 정도면 넓은 거지요. 돈이든 뭐든 딱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되지 않겠소. 그 이상은 욕심 안 부립니다.” 왠지 이 사람, 범상치 않아 보인다.
- 명장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텐데요.
“그런 얘기는 맨 정신으로 하는 게 아닌데... 우여곡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6살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 고향인 파주에서 할아버지 돈 5000환을 몰래 가지고 나와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 친구 세 놈과 함께 왔는데 서울 청량리에서 다시 춘천행 기차를 타는 바람에 내 파란만장 인생이 시작됐지요. 춘천에 도착해서 친구들과 대합실에서 노숙을 하다가 친구 중 1명이 중국집에 취직되는 바람에 우선 먹고 자는 것은 해결 됐어요.”
그는 소 한 마리를 키우며 논 20마지기에 농사를 짓는 중농 집안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이 꿈과 희망을 찾아 도시로 ‘탈출’을 감행한 것을 보면 어려서부터 배짱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장일을 하게 되었나요?
“집에서 돈을 훔쳐 나왔으니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죠. 춘천 중앙로에서 시계, 금은방, 인장을 함께 취급하는 상문사라는 가게에 무조건 들어가 먼저 시계수리를 배우겠다고 우겼지요.”
그 때 그의 딱한 사정을 이한구 선생이 알아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한구 선생은 인장업계에서 알아주는 ‘달인’이었다. 처음에는 시계수리를 하며 먹고 자고 했는데 상문사가 도장을 잘 판다는 소문이 나서 강원도 일대에 있는 관공서나 은행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처음엔 시계수리를 하다가 도장 주문이 밀리자 이한구 선생에게 도장 새기는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다 서울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
“춘천에서 2년 정도 일하다 보니 더 큰 곳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나더군요. 이한구 선생에게 나의 꿈과 열정을 얘기 했더니 그러라고 하시면서 당시 동아백화점(신세계백화점 전신) 안에 있는 인장가게까지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때 첫 월급 12,000환을 타서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다짜고짜 뺨을 때리시더군요. 어디서 도둑질을 해 왔냐는 겁니다. 그러더니 나를 끌고 동아백화점 인장가게 주인에게 가 아들을 잘 못 두었다며 비는 겁니다. 주인이 어안이 벙벙해 하며 자기가 준 월급이 맞다고 하자 그때서야 오해를 푸시더군요.”
그 당시 공무원 월급이 보통 4,000환 정도였다니 무려 3배가 넘는 돈을 받은 그는 도장 파는 솜씨가 좋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그는 또 상업미술과 예술글씨의 대가였던 이상돈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인장의 길을 걷게 된다. 출세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스승을 잘 만났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묘목이라도 토양과 맞지 않으면 제대로 자랄 수가 없듯이 사람도 제아무리 혼자 똑똑해도 주변에서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인생항로를 똑바로 잡기 어렵다.
-대한미국미술대전 문인화 부문에서 특선까지 했던데요.
“예전에는 도장 파는 직업이 천한 직업으로 무시를 당했어요. 선 볼 때 ‘도장쟁이’라고 하면 퇴짜 맞기 일쑤였죠. 무엇보다도 못 배운 사람으로 취급받기 싫어 그림공부를 했고 미술대전에서 특선까지 한 적 있어요. 그래도 그림을 그린다면 좀 인정해주었으니까요. 지금도 동두천 집에 가면 화실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동두천에서 작은 텃밭이 딸린 단독 주택에서 지내면서 창신동 인장가게까지 전철로 매일 출퇴근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동두천 동네사람들은 자기가 명인이란 것을 대부분 모른다고 한다.
-인감도장을 서명(署名)으로 대신하는 제도가 시행된다고 하던데요?
“인감과 서명을 함께 병행하여 사용하도록 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인제도를 전적으로 시행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 명장이 되기 전부터 인장부문 명장 심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초기에는 명장도 아닌 내가 명장을 심사한 꼴이었죠. 그래서 나도 명장을 신청했더니 심사위원들이 심사하기 난처했는지 그 해 신청자를 전부 낙방 시켜버렸어요. 그래서 그 다음 해인 2008년에 명장이 됐습니다.”
- 혹시 명장에게 인장을 새기면서도 값을 깎아 달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기는 거의가 단골손님들이어서 시세를 대부분 아는데 얼마 전 인장 재료를 다른데에서 구해와 파기만 해 달라고 하면서 깎아달라기에 그렇게는 안 한다고 돌려보낸 적도 있어요.”
-도장에도 길과 흉이 들어있습니까?
“그건 상술입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 도장이 좋다고 하지만 진짜는 구하기 쉽지 않죠. 시중에서 파는 99%는 가짜라고 봅니다.”
-인장가게 하면서 어려운 점도 있었을 텐데요.
“1980년 경 종각 근처에서 3년 정도 신문광고를 내면서 인장가게를 크게 했어요. 그런데 건물이 갑자기 헐리면서 1년 만에 새로 짓겠다 해놓고 3년이나 걸렸죠. 결국 인장 가게 문을 닫았고 그 동안의 광고비만 날렸죠. 그때 안면마비와 백내장까지 겹쳐 도장 파는 일은 못하고 부모님과 동생 가족 등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리느라 미장, 목수일, 농사까지 했습니다. 그 시절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래도 젊을 때 이것 저것 많이 해봤어요. 가난했지만 그 때의 경험이 나를 명장으로 만든 원천이 되었죠. 이제는 죽을 때까지 후배 양성이나 하면서 살렵니다. 허허”
그가 오는 9월 30일까지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한국인과 인장> 전시회가 열린다며 돌아가는 길에 한번 들러보라고 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이런 문구가 눈에 띈다. ‘인(印)이란 믿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후세에까지 전하여진다. 그가 선(善)하다면 전해지지만 선(善)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이니 이런 사실을 안다면 수신(修身)해야 한다는 점도 알 것이다.’
그 밖에도 조상들의 정신과 사연을 담은 인장과 전각이 2,3,4층에 가득하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전시장 4층 중앙에 명장들이 새긴 인장코너가 있는데 여기에 유 씨가 만든 오바마 미국 대통령 가족과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인장도 전시되어 있었다. 입장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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