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촌놈 인요한 이야기

시민기자 이상무

발행일 2010.11.15. 00:00

수정일 2015.12.18. 15:27

조회 7,643

미국 이름 존 린튼. 한국 이름 인요한. 본래의 성인 린튼(Linton)에서 ‘인’이라는 성을 땄고, 성서에 나오는 존(John)을 한국에서 부르는 대로 이름은 요한이라 지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 하나인 ‘인(印)’과는 다른 ‘인'이다. 미국 이름인 '존'을 어릴 적 동네 사람들이 ‘짠이’라 불렀다. ‘존’이 전라도 버전으로 ‘짠’이 된 것인데 그래도 그 호칭이 좋았다고 한다. 몇 차례 스케줄을 조정한 끝에 지난 11월 10일 오후, 그가 근무하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에서 인요한 소장을 어렵게 만났다.

인터뷰 중에도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받느라 인요한 소장은 바빴다.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에는 의사 7명, 수련의 2명 등 9명이 근무하고 있다. 사무보조원까지 합치면 25명이 있다. “연간 외국인 이용자는 3만 명 정도, 하루 평균 100명 정도로 국내 병원 중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병원입니다. 내국인들도 유학 갈 때나 이민 갈 때 2만 명 정도가 신체검사를 받아 모두 5만 명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분주하죠“라며 인요한 소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센터는 국내 최초로 2007년에 JCI(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 국제표준인증을 받았고 올해 다시 3년을 갱신하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하다고 하니 인요한 소장의 대답은 의외다. "집사람이 싫어합니다." 시중에 출판된『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란 책에 집안 얘기가 많이 소개 되어있다고 하면서, 대신 짤막하게 공개되지 않은 얘기를 해주었다. “위로 두 딸들은 미국에서 수련의 과정 때 태어났고 막내아들은 한국에서 낳았습니다. 큰딸은 지금 외국인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고, 둘째는 미국에서 치대에 다니고, 막내는 외국인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어요. 여자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왔을 때 얼굴 생김새가 외국인처럼 생겨 국내 학교에서는 시달릴까봐 외국인학교로 보냈죠.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차별이 심했으니까요."

본인은 의사였기 때문에 언제나 바빠 아이들은 주로 집사람이 키웠고, 나중에는 집사람도 치과의사로 바빠 아이 돌보는 사람을 따로 뒀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항상 너무너무 미안할 뿐이다. 집사람은 중국 교포 출신으로 연세대 80년 입학 동기로 만났다. “음식은 주로 한식으로 먹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떡국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습니다. 1년 넘은 전라도 묵은지는 예술이죠. 식당에 갈 때도 싸가지고 갑니다(웃음)”라면서 자연스럽게 유년기에 순천에서 천방지축으로 놀던 얘기로 흘러갔다.  

“어릴 적 동네 사람들에게 고마웠던 점은 얼굴 차별을 안했기 때문에 내 얼굴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못 느끼고, 거울도 보지 않고 지냈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놀면서 제일 어려웠던 점이 하나 있었어요. 서양 사람들은 일찌감치 포경 수술을 하는데 한국 아이들은 포경수술을 안 해 순천 저수지에서 수영을 할 때 나는 '위 낯'은 가리지 않았는데 '아래 낯'은 가렸어요.” 맛깔스런 그의 얘기 보따리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번데기 먹기, 순천 시내를 흐르는 동천에서 물장구 치고 고기잡기, 향림사 저수지에서 놀던 얘기, 여름과 가을이면 앵두ㆍ감ㆍ수박을 서리하던 얘기, 당시 먹을 게 없어 보릿고개 때 고구마에 김치 해서 먹던 얘기, 고구마가 썩지 않게 물에 씻지 않은 상태로 윗목에 보관하여 겨울 내내 꺼내 먹던 얘기, 개에게 고구마 껍질을 던지면 땅에 떨어지기 전에 하나하나 받아먹던 얘기 등등을 들려 주었다. 파란 눈을 가진 꼬마에게 순천은 "지구의 중심이고 내 마음의 중심"이었다며 지금도 지리산을 한 달에 한 번씩 간다고 하였다.

“1956년도에 형님 세 명이 결핵을 알아 60년부터 집에서 결핵요양소를 운영하느라 어머니는 무척 바빴기에, 남편을 일찍 여윈 동네 할머니로부터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방법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라면서 그는 그 할머니로부터 군불을 땐 아랫목에 앉아 일제시대, 6ㆍ25, 여순사건 얘기나 어려운 고비를 넘긴 얘기, 농사는 언제 심고 언제 걷어야 되는지의 얘기,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면 비가 오고, 인간이 이러면 되고 안 되는 일 등 살면서 필요한 내용을 듣고 배웠다고 했다. 그는 '아랫목 가정교육'이 중요한데 지금은 아파트 때문에 아랫목 교육이 없어지는 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190㎝가 넘는 키, 110㎏의 체중인 거구에다 흰 머리카락, 흰 눈썹과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모를 가진 인요한이란 사람은 첫 인상부터 보통 사람같지 않았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인 유진 벨 선교사가 그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이며,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600여 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하다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휴 린튼 선교사가 그의 부친으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까지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1984년 4월 10일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 어머니에게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해도 전혀 두렵지가 않아요. 이제껏 살아온 삶이 부끄럽지 않고 행복하기 때문이겠죠?”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당당한 자세의 삶인가!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우리 한국인들이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하여 달라고 하니 한참 망설이더니 “가진 자와 안 가진 자ㆍ진보와 보수ㆍ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소모전 하지 마십쇼. 한국이 세계적으로 뻗어가는 데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다툼과 타협 못하는 문화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라도 존중하고 양보하면서 끌어안고 함께 가야 합니다. 타 민족과는 융합을 잘 하면서 왜 자기들끼리 싸웁니까?”라며 애정 어린 충고를 주었다. 그의 국적은 미국이지만, 4대째 110여 년간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도움을 준 ‘짠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은 똑똑하고 스마트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가서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고, 5년이면 80% 이상이 집을 삽니다. 유태인보다 훨씬 똑똑한 민족이죠”라고 하면서 인요한 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간곡히 전했다. “한국은 비록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없이 당하기만 하였지만, 이제는 잘 사는 국가를 만들었고, 세계에 당신네 나라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도하는 나라가 될 수 있어요.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순정(純情)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정(情)과 남을 배신 않고 의리(義理)를 지키는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세계에 나간다면 세계 사람도 따라올 것입니다." 가슴을 '짠~하게' 울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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