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화려하다

admin

발행일 2010.09.09. 00:00

수정일 2010.09.09. 00:00

조회 3,136

장면 하나. 광화문이 최근 몇 년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 밤중에 광화문 근처 빌딩 옥상에서 바라보았는데 대문 밑의 작은 조명들이 은근히 광화문을 비추고 있는 것이 아름다웠다. 광장을 따라 세로로 나열된 불빛을 따라가다보면 그 정점에 광화문이 놓여져 있는데 밤에는 조명으로 그 윤곽을 더듬어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낮보다 광화문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대부분이 어둠 속에 잠겨 있으나 순간순간을 조명으로 밝혀주어 나머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 기묘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 조명 위의 광화문은 실로 낮보다 아름다웠다.

장면 둘. 광화문에서 흥국빌딩 쪽으로 방향을 돌려 구세군 중앙회관 건물과 덕수초등학교를 지나면 아담한 길이 나온다. 왼 편의 돌담길 너머에 덕수궁이 있고 오른 편에는 구한 말 해외공사들의 영사관으로 쓰였던 건물들이 보인다. 지나다니는 차량이나 사람이 없어 적막함이 감도는 이곳에 다만 길 양 옆으로 낮은 볼라드가 설치되어 있다. 반구형의 이 볼라드 조명을 통해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는데 이 길에 딱 어울려 보인다. 밝은 빛보다 조용조용하게 속삭이듯 새어오는 빛이 있어야 비로소 이 거리가 가진 어두움의 매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동 언덕길에 놓여져 있는 조명을 따라 걷다보면 서울의 밤 하늘도 까맣고 조용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장면 셋. 그러나 도시의 밤은 때로 낮보다 밝고 화려하다. 서울역 광장 맞은편에 놓인 서울스퀘어 건물은 몇 년 전 리모델링을 통해 새롭게 조형되면서 미디어파샤드를 통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LED를 통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나 다양한 형상을 끊임없이 바꾸어 표현하는데, 새롭게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이곳은 주변 건물의 지대가 높지 않고 넓은 광장을 관객 삼아 밝은 빛이 계속 투사되고 있기 때문에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이곳에서는 빛이라는 것이, 조명이라는 것이 이토록 화려할 수 있음에 놀라게 된다.

빛에 대한 이야기

그녀를 인터뷰하러 신사동 가로수길 사무실로 향하기 전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조명디자인이라는 분야는 사실 디자인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인터뷰 가기 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명디자인이란 길거리에 아름다운 색의 조명을 설치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도 신호등이 최근 LED로 바뀌어서 보기 편하다는 의견이 전부였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메인 작품을 비추는 조명이 그 자체로 디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궁금했다. 빛을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일까. 인터뷰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았다.

이미애 소장이 대학에서 제품디자인을 전공하고 조명디자인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가로수길 카페에 앉아 손에 집어든 그녀의 이력서에는 그 이십 년의 시간이 증명하는 다양한 경력과, 그 경력을 훌쩍 뛰어넘는 조명디자인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성찰이 느껴졌다. 독립문 경관조명 설계·시공, 청담대교 경관조명 설계·시공, 세종로 가로수 야간조명 설계·시공, 동부가락센트레빌 경관조명으로 서울시건축상 야관경관조명부문 수상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사무실은 가로수길에서 한 골목 옆에 놓인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특이하게도 실내에 조명을 켜두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의아했다. 조명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사무실은 당연히 화려한 빛으로 가득하고 그 빛에 압도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창문에 블라인드까지 쳐놓고 어두운대로 밝은대로 방 안을 그대로 두는 것이었다. 궃은 날씨에 비가 오는 날이었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빛에 대한 이야기이고, 빛이라는 것은 어쩌면 화려한 장식처럼 느껴지는 것인데 과연 조명디자인이라는 것은 빛의 어떠함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첫 질문에 이미애 소장은 조명'디자인'이 아니라 조명'설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황정운: 조명디자인이란 무엇일까요? 제품이나 시각디자인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조명디자인은 조금 생소하네요.

이미애: 사실 조명디자인 업계에 있지만 어디 가나 디자인이라는 표현보다 설계라는 말을 주로 하곤 해요. 크게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보죠. 어떤 측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디자인은 기능보다 형태를 더 중요하게 여겨왔어요. 얼마나 더 근사한 외관을 표현할 수 있는지가 화두였죠. 디자이너들의 오랜 격언 중 하나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이 있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형태나 화려한 스타일링 중심의 공부를 해왔던 게 사실이에요. 사실 형태에 미적인 요소를 더 가미하기보다는 그 내부의 기능을 더 올바르게 표현하는 법이 중요해요. 그런 가운데 조명은 그 기능을 얼마나 극대화하여 표현하느냐에 관심이 많죠. 이 빛이 어디서 어디로 모아져서 갈 것인가, 이러한 광원의 색은 어떻게 조합해 낼 것인가, 하는 것들이죠.

황정운: 과학적이네요?

이미애: 과학적이죠, 수학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스타일링이나 디자인이라기보다는 조명설계라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조명디자인은 단순히 형태적인 것만 관심을 두지 않는 거죠. 왜냐하면 전기리는 에너지가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에 조명 설계는 이 조명이 어떻게 인간 생활에 가장 효과적으로, 아름답게, 자원을 절약하며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종합적인 고민이죠.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조명이라고 하면 가로등이나 교량의 조명같이 형태로서의 빛을 생각하기 마련이었는데, 조명설계는 오히려 빛에 대해 종합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교량에 조명을 설치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미애 소장이 청담대교 조명 시설을 작업할 때의 일이다. 교량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이 불고 차가 지나다닐 때 위 아래로 흔들리는 경우가 있으니 어떤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냐를 선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한다.

"한강에 설치하는 가로등은 종로에 있는 가로등과는 달라야 해요. 그냥 전등을 매달아두는 것이 아니죠. 빛이 어느 장소에 어떻게 모이느냐, 쓸데없는 빛을 만들어내지 않고 필요한 부분에 빛을 보내주느냐, 그런 고려를 해야 해요." 조명설계라는 것은 간단해 보여도 참으로 어려운 작업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조명 설계의 이야기는 '빛공해(Light Pollution)'에 이르렀다. 빛공해란 빛이 없는 밤에도 인공적인 조명을 지나치게 사용한 나머지 어두워야 할 공간을 인위적으로 밝게 하여 시각적인 혼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애 소장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빛공해를 없애기 위해서도 올바른 조명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밤에 잠을 잘 때 실외의 빛이 실내로 영향을 미치는 것, 농경지를 지나는 도로에서 빛이 새어나와 주변 경작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 도시의 빛으로 인해 점차 별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냐며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빛과 조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얼굴은 밝게 상기되어 있었다. 긍정의 뜻이었다. 빛공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려해야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조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인 신호라는 점이었다. 단순히 어둠을 밝혀주는 것에서 벗어나 조명디자인을 올바르게 활용하면 훌륭히 도시의 밤을 빛나게 할 수 있다는 무언의 인식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황정운: 건설사들이 주거단지를 조성할 때도 조명설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요?

이미애: 2000년도에 밀레니엄이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빛 축제를 많이 했어요. 프랑스 파리에는 에펠탑이나 개선문 근처에서 큰 규모의 빛 축제를 열었죠. 마침 서울도 여러 디자이너들이 모여 광화문 근처에서 작은 규모의 빛 축제를 시작하면서 서울에서도 빛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조절을 못한 거죠. 그래서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며 단지 내에 조명을 과도하게 설치하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빛공해가 생기는 거죠. 이제는 오히려 많이 제어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빛공해로 과도하게 표현되지만 않는다면 조명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필요도 있어요.

황정운: 어떤 측면에서입니까?

이미애: 야경도 하나의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높아진 것이지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일이에요. 일본하고 서울은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라서 외국 사람들이 느꼈을 때는 나라를 옮겨다닌다는 인식은 거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월드컵 때 낮에는 한국에서 경기를 보고 밤에는 일본으로 넘어가서 야경을 즐기고 도시를 즐긴다는 말이 나왔죠. 그때만 해도 서울에 조명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때였으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야경은 아주 중요한 관광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도시의 밤을 어떤 조명을 이용해서 어떤 느낌으로 밝혀주느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 이 도시가 참으로 매력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는 거죠. 그게 바로 빛과 조명의 힘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가로수길로 다시 나오니 낮이 밤으로 바뀌어 있었다. 맞다. 도시는 낮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도시는 낮에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사실 낮의 도시는 참 많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여러 이벤트, 시선을 압도하는 높은 건축물들, 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교량……. 도시가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대부분 낮에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때뿐이다. 그러나 그 감탄도 잠시, 밤이 되면 도시 위에 어둠이 내려앉아 그것들이 모두 가려진다. 그러면 밤의 도시에는 무엇이 남는가? 바로 빛이다. 여기저기 거리에 아름답게 설계된 가로등, 건물을 비추는 크고 작은 색색의 조명들, 도로 위에 설치된 낮은 조명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밤의 도시는 빛으로 그 윤곽을 더듬고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빛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다름 아닌 도시를 어떻게 표현해낼까 하는 고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낮에 우리가 본 바로 그 도시의 모습에서 밤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빛은 도시에서 뒤늦게 발견한 아름다움이지만 동시에 도시에 대한 첫인상이기도 하며, 그만큼 우리가 소중하게 그리고 더욱 신중한 사고를 거쳐 체에 걸러내야 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시의 밤은 그 어떤 낮보다 화려하게 빛난다. 조명디자인은 바로 그 밤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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