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되는 것, 마지막 효도였죠!
admin
발행일 2010.06.30. 00:00
공무원도 마다하고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시인 김순진씨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중학교 3학년 때 떠나보낸 어머니가 함께 숨 쉬고 있었다. 간경화로 고생하시다가 너무나 가난한 살림 때문에 제대로 병원치료 한 번 못 받게 하고 떠난 어머니가 늘 명치끝에 고여 있었다. 하늘나라로 가시긴 3일전 가을 소풍 백일장에 나가서 시를 써서 장원이 된 아들을 반기며 내내 울먹거리며 기뻐하셨다는 어머니. “내가 너를 가르치지 못하고 이렇게 가니 정말로 미안하구나, 너는 글을 잘 쓰니까 글쓰기 공부를 열심히 해라!” 장래를 염려하시며 힘겹게 떠나던 어머니 유언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며 회상하는 목소리에서 오래전 젖은 소년의 눈빛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문학이란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요. 사람들은 시를 쓰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하고 수없이 묻지요. 시가 밥이 되거나 돈이 되진 않았어요. 원고료만으로 살기에는 밥 굶기에 딱이었죠. 그러나 많은 시간을 노동판에서 보내고 길거리에서 노점을 해봤지만 아무도 저에게 ‘야, 어이, 김씨’와 같은 말로 함부로 대하진 않았어요. 제 손에는 언제나 시집과 시론집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죠. 살아가면서 밥이나 돈보다 더 소중한 게 뭘까요? 저에겐 詩입니다. 자식 대대로 물려 줄 수 있는 시집 한 권만 있어도 정신적으로 엄청난 유산이 되지 않을까요.” 시란 처절함을 견뎌낸 자신감이다 “가장 힘들 때 저는 문학공부를 시작했어요. 먼저 나를 세워야지요. 내 정신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어떤 사업도 직장도 저에겐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죠. 장대비가 퍼붓는 날이거나,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에도 포장마차에서 갖가지 튀김을 튀겨내고 어묵국물을 끓이듯 저는 눈물로 시를 튀기고 끓였지요. 포장마차 알전구 아래서 5년을 넘게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고 책을 읽었어요. 가난할수록, 촌놈일수록, 아픔이 많을수록 할 말이 많은 문학이 좋았어요. 동네 사람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했지요. 저도 미친 줄은 알고 있었죠. 시에 미쳐 있었으니까요.” “저는 죽기 살기로 시 공부를 했지요. 공자와 맹자, 장자까지도 두루 섭렵하면서 내면의 깊은 우물을 파면서요. 그렇게 몇 년을 미친 듯이 공부 하고나니까 아, 이거구나. '시란 처절함을 견뎌낸 자신감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죠.” 실제로 그가 쓴 수필집 「리어카 한 대」에서는 <좋은 친구 명광이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통해서 시인이 되기 위해 힘겹게 걸어 온 삶을 자서전적인 문체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글 속에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의 이야기가 많았다. 리어카 한 대에 얽힌 이야기와 추수감사절에 생긴 왕사과 한 개를 노숙하는 노인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려는 둥글고 군침 도는 시인의 마음이 농익어 있었다. 그리고 태극기 사랑도 유별나다. 운전 중에 무심코 지나쳤던 대로변에 뒹구는 태극기를 잊지 못해 다시 먼 길을 되돌아가는 시인, 그 태극기와 어머니 유품인 태극기를 이사할 때마다 제일 소중하게 챙긴다는 시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팔 걷어 부친다는 지인들의 말과, 자신을 던져 누군가에게 기꺼이 그 무엇이라도 되어 주려는 개똥참외의 철학으로 땀 흘리며 일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진정한 휴머니스트 시인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강물은 돌을 던져도 잠시 출렁일 뿐, 유유히 흘러간다
“노점상을 하면서 시작한 공부에 용기가 생겨서 평생 글속에 파묻혀 살기로 마음먹었지요. 이왕에 글을 쓰려면 책을 만들기 위해 출판사를 내기로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2003년, 청계천의 황학교 근처에서 문학공원 출판사를 내고, 2004년에는 월간<스토리문학>을 창간하게 되었지요. 무일푼으로 시작한 출판사와 월간지를 운영하면서 정말로 힘들었어요. 지금까지 매 달 한 번도 금전으로부터 자유로워 본적이 없었어요.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심각했지만 마음을 비우니까 오히려 그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더라고요. 오직 성실과 겸손함으로 문학을 추구하면서 운영하니까 책을 내겠다는 사람이 이어져서 간신히 유지해 나가고 있지요. 비록 어려운 여건이지만 보람 있는 것은 문단의 많은 원로작가선배님들을 만나는 일이며, 그분들로부터 인생담을 듣고 힘을 얻는 것이죠. 또한 저처럼 시인이 되고 싶어도 가난하고 힘겨워서 시를 못 배운 분들을 위해 시를 가르치고 등단시키는 일이나 책을 출간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일은 정말로 뿌듯하지요.” 시인이 시를 쓴 지는 벌써 30여년이 되어간다. 첫 시집 「광대 이야기」를 시작으로 시론집 「좋은 시를 쓰려면」, 수필집 「리어카 한 대」, 최근에 나온 청소년 성장 소설집 「너, 별똥별 먹어봤니」를 펴냈고, 가곡으로는 <국수나 한 그릇 하러가세>, <사랑으로 가는 길> 등을 작사했다. 시인은 시만 쓰고 있지 않았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그릇마다 다른 크기와 빛깔로 자신의 삶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많은 장르 중에서 시인님의 이름 뒤에 가장 마음에 드는 꼬리표가 붙는다면 무엇인지요?” 라고 물었더니 “그야 당연히 시인이란 이름이지요.”(흐뭇한 미소) 유난히 고집이 센 와이셔츠의 주인은/ 간 쓸개를 모두 빼주고도/ 그녀의 하얀 손에 조물조물 녹아/ 낭창낭창 춤을 추고/ 직장으로 거래처로 휘돌았을 바지는/ 생업의 늪에서 잠시 발을 빼고... 시인의 자작시<빨래 너는 여자>中에서. 시인은 몇 년 전부터 은평구 문화센터에서 강의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스토리문학대학, 김포문학대학 등지에서 시 창작 강의를 해 오고 있다. 시인의 삶은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강물은 돌을 던져도 파문만 일뿐 잠시도 멈추지 않고 유유히 흘러간다. 시인의 손에는 오늘도 한 권의 시집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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