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아가씨, 대한민국에서 아줌마 되기

admin

발행일 2010.04.05. 00:00

수정일 2010.04.05. 00:00

조회 4,603

“남편은 왕 아니예요, 난 신하가 아니에요.”
1999년 2월, 당시 국제선이 드나들던 김포공항. 한 여성이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다. 앞으로 남편이 될 남자……. 그 남자의 가족……. 만남을 기다리는 시선 속에서 찾는다. 낯선 남자, 낯선 가족, 낯선 장소, 그렇다 모두 낯설다. 오는 동안 내내 마른침을 삼켰을 터. 뒷걸음질 치고 싶은 걸음마다 스멀거리는 두려움을 꼭꼭 즈려 밟았을 터. 더구나 날씨마저 늦겨울이라 더위에 익숙한 피부는 잔뜩 웅크리고 있다. 필리핀 태생 돈나벨 카시퐁(39) 씨. 그날의 이야기가 옛 추억이 될 만큼 세월은 흐르고, 이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똘똘한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필리핀에서 남편의 이모가 운영하던 식당. 그 안에서 이뤄진 짧은 만남 속에 “우리 결혼합시다!”란 이 한마디가 돈나벨 카시퐁이란 한 여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삶이 바뀌게 한 건 남편의 한마디였지만 선택은 그녀의 몫. 고스란히 떠안을 만큼 모험심이 가득한 나이였다. 19세란 나이는. 그러나 모험심만으로 견뎌내기에는 결혼은 만만치 않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법. 여기에 나 홀로 떨어진 고립감은 고향 쪽 하늘만 봐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아픔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언어의 벽은 높기만 하고 남편 또한 자상한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터였다. 남편도 모르는 아내의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같은 처지의 친구라도 곁에 있다면 큰 위로가 되었겠지만, 이제 막 결혼한 새댁에게는 친구를 찾아볼 여력조차 없었다.

환경의 변화와 함께 또 한번 겪게 되는 시련은 바로 임신과 출산이었다. 안정된 상태였다면 여자로서 이보다 큰 선물은 없었을 터. 그러나 도움 청할 친정은 멀기만 하고 언어 소통은 자유롭지 못해 이중 삼중으로 둘러진 벽에 갇힌 것만 같았다. 벽 안에 갇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지조차 모를 눈물을 흘리는 것 뿐. 임신과 출산 때 겪은 서러움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는데 그래서일까. 두 눈에 눈물이 맺힌다. 금세라도 떨어질 기세다. “시어머니가 시골에 계세요. (산후조리 해주러)올라올까 하는데 남편이 오지 말라고 했어요. (어머니) 나이가 많아요. 힘들어서 많이 울었어요. 얘기할 사람도 없었어요. 남편은 왕 아니에요. 난 신하 아니에요. 안 도와줘요. 필리핀에서는 여자랑 남자랑 똑같아요. (친정)아버지도 같이 도와줬어요.”

남편은 현대판 자린고비, 그러나……
남편이 왕도 아니고, 자신은 신하가 아니다. 똑같이 출근해서 일하는데 왜 육아와 가정 일은 자신만 해야 하는지 답답하다는 그녀. 그들의 부부싸움 주제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대한민국 맞벌이 가족의 현실일 뿐. 그리고 그 스트레스 해소법 또한 마찬가지. 남편 흉보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을까. 하지만 대뜸 짠돌이라니. 짧은 순간 온갖 상상이 나래를 편다. 조심스럽게 대답할 말을 찾고 있을 때 거침없이 쏟아지는 남편 흉보기.“우리 남편 짠돌이예요. 진짜로 돈 안 써요. 담배도 돈 아깝다고 끊었어요. 생활비도 안 줘요. 용돈도 없고, 제가 벌어서 써요. 회사 다니잖아요. 출근복을 아름다운 가게(재활용 매장)에서 샀는데 혼났어요. 만 원이거든요. 이 옷 비싸 보이죠.(웃음)”

결혼 11년차인 아줌마의 내공인가.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남편 흉은 정을 감춘 것인지 메마른 증오를 나타내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산 옷이 비싸 보이지 않냐고 묻는 그 말에는 솔직 담백한 그녀의 성격이 묻어난다. 옷이란 주관적인 것. 질문의 답을 기다렸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알뜰함을 내비치고 있다. 의사소통이 자유롭다지만 세 어절 이상 이어지지 않아 아직은 남편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돈나벨 카시퐁 씨는“(남편에게)통장 보여달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은 생활비도 받고 월급도 관리한대요. 난 아무 것도 없어요. 핸드폰도 안 사줘서 (제가)일해서 샀어요. 애들이 먹고 싶어하는 것도 안 사줬어요.”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남편이 현대판 자린고비인가 하던 차에 이어지는 또 다른 그녀의 말. 방법은 지독했지만 남편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삶의 목적이 따로 있었다고. ‘노후를 필리핀에서 보내기 위한 목돈 마련’이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단다. 돈이 있다는 것을 알면 낭비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는 남편. 그 말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되어버리고, 남편 흉은 사랑할 에너지로 전환되어 다시 일상에 묻힌다.

힘이 되어준 시어머니, “네가 힘들지~”
이렇게 11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한 남자를 알아가고, 그녀의 삶도 조금씩 닦여 가고 있었다. 더구나 보석 같은 두 아들의 성장과 밝음이 그녀의 마음을 차차 녹였을 터. 두 아들은 학교 생활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가정이 편안해지기까지 나이 많으신 시어머니의 배려도 컸다. 이해하고 기다려주고 다독여준 힘, 바로 어머니의 그늘이었다. 아들의 단점을 덮기보다는 그녀의 편에서 “네가 힘들지”라고 격려해주었단다. 그리고 남편의 형제들 또한 어려운 일 있으면 자신들에게 말하라고 두둔해줬다. 내 편이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후원은 없을 듯. 주변 사람, 특히 그 가족들의 배려는 막 시작한 가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대들보다. 무엇보다 개인의 마음 자세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렇게 조금씩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한 남자의 아내, 두 아들의 엄마로서 자리매김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대한민국 대표아줌마가 된 것이다.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하자 주변도 돌아보게 되었다. “저처럼 시집온 친구 있어요. 같이 모여서 고향 음식도 만들어요. 수다도 떨고 어려운 사람 돕기도 해요”라며 유쾌하게 목소리가 밝아지는 돈나벨 카시퐁 씨다. 그리고 사회 생활도 시작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숨은 재주도 발굴해 노래도 부른다. 노래자랑에 나가 상을 받을 만큼의 실력이다. 특히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가요를 많이 불렀단다. 노래는 그녀 삶의 윤활유이자 스트레스를 완화해주는 치료제가 되고 있다.

소통할 수 없는 그들에게 “언니가 되어주고 싶어요”
현재 그녀는 일을 바꿔 ‘동대문구 다문화 가족지원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통역과 번역 업무를 담당하며 국제결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을 돕는다. 무엇보다 고향을 떠나온 같은 입장이라, 공감대를 형성하며 마음을 여는데 큰 힘을 불어넣고 있다. 더구나 그녀 자신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그녀는 “이혼하겠다고 찾아오는 부부들도 있고, 말이 안 통해 병원에 갈수 없다고 연락하는 분도 있어요.”라며 전한다. 국제 결혼한 남편이 못살겠다고 이혼하겠다는 걸 막은 적도 있다. 아내가 3개월 된 아이를 두고 매일 컴퓨터만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싸움의 구실이 되었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감정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게 된 사례다. 연락이 온 때가 마침 주말이라 집으로 초대해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했다. 아내는 산후 우울증과 도와주는 이 없는 외로운 생활, 남편의 일방적인 행동 등으로 자신에겐 오직 컴퓨터가 친구였다고. 더구나 아들밖에 모르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단다. 이런 갈등이 드러나도록 다문화 가족지원센터에서는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무엇보다 심리적인 위로와 안정을 찾도록 돕는 것이 최우선 과제, 돈나벨 카피퐁 씨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11년의 세월, 그 동안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국제선이 바뀌고 한국이란 땅이 익숙해 오히려 친정이 더 낯설다는 그녀. 양말 신을 일이 없는 필리핀에서 자랐지만 이제 습관처럼 양말을 신는 그녀가 되었다. 어디에 있든 자식과 남편이 있는 곳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존재. 여자란 그런 것인가. 앞으로 짠돌이 남편을 이해하고 묵묵히 내조하는 일만 남았다. 노후는 친정인 필리핀에서 보내자는 남편의 제안, 그래서 더욱 절약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불만 섞인 목소리. 그러면서도 그날이 빨리 오기를 꿈 꾼다. 양말 대신 발가락 사이로 쏟아지는 더운 열기를 느끼며 함께 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결혼이든 인내를 요구하는 법. 왜 국제 결혼이 늘고 있고,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 장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을 접어두고라도 말이다.

시민기자/장경아
jka5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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