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이란 숫자는 나의 운명
admin
발행일 2010.03.15. 00:00
소소한 것으로 만드는 위대한 세상 9호선 급행열차를 타고 도착한 공항시장역. 그곳에서 10여 분 정도 걸으니 진정군 선생(71)이 운영하고 있는 전파사가 나타났다. 늦은 시간에도 불이 켜진 전파사 입구에는 그의 동전공예품이 전시돼 있었고, 문을 들어서자 각종 감사패, 공로패, 기네스기록증까지 온갖 상장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일거리로 시작을 했는데, 지금은 일종의 작품 활동이 됐지.” 그가 동전공예를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청주에서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와 강남의 부촌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건물 경비를 했다. 주변을 관찰하던 그는 공터에서 모여 놀던 아이들을 보곤 했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뭘 하나 궁금해서 그들의 놀이터를 찾았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10원 짜리 동전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철이 없었지.” 그는 혀를 차면서 10원짜리 동전을 허리를 굽혀 하나하나 주웠고, 집으로 가져와 씻었다. 그런 일들은 거의 매일 반복됐고, 어느덧 그가 모은 동전은 큰 자루로 하나가 됐다. “처음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었는데, 동전이 모여서 한 자루 가득한 것을 보니까 뭔가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다보탑을 만들기로 했지.” 그는 모아둔 동전들을 쏟아서 색깔별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10원이었지만, 그 동전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었다. 그는 새 동전과 오래된 동전을 구분하고, 모양에 따라 분류했다. 그리고 넓은 판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동전들을 하나씩 고정해 나갔다. 그가 처음 만든 작품이 바로 다보탑이었고, 10원 짜리 동전 속의 모델인 다보탑은 다시 10원 동전들이 모여서 새롭게 태어났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어. 아마도 다들 그냥 지나쳤던 사소한 것이 반란을 일으키니까 신기하게 여겼던 거 같아.” 그렇게 당시 신문사, 방송국에서 연일 그를 찾아왔고, 모 은행에서는 직접 이를 기증해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도 작품이 완성된 다음엔 해체해서 어린이 단체에 기증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받은 기금은 바로 5월 5일 어린이날 10살 어린이들 100명에게 기부를 했다.
“그냥 멍하니 작업하기가 뭐해서 동전을 하나하나 위치에 놓을 때마다 소원을 빌었지.” 동전공예작업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재료가 되는 동전들을 하나하나 분류를 해야 하고, 전체적인 구조에 맞춰서 배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수개월이 소요되기도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작업을 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만들기에는 좀 무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조그만 소원들을 동전 하나하나에 담았다. 파랑새를 만들면서 월드컵의 성공개최를 기원했고, 태극기를 만들면서 평화통일을 소망했고, 남대문을 만들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가, 나중엔 대단하다 하더라 “10원이 가진 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 그렇게 10원씩 저금하기 시작했어.” 진정군 선생은 97년 2002년 월드컵 개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저축을 시작했다. 저축된 금액은 월드컵 경기장을 짓는 데 기부할 계획이었다. 이는 나름대로는 좀 더 적극적인 소원성취의 방법이었다. 그는 당시 을지로에 위치한 서울은행이라는 곳에 통장을 만들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10시에 10원씩 저금을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은행원이 장난인 줄 알고 어이없이 웃기만 했지.” 바쁜 은행에서 10원으로 통장을 만들겠다고 온 사람을 진지하게 받아 줄 리가 없었다. 어렵게 통장을 만들어서 다음날 10시에 찾았다. 처음의 어이없던 웃음은 사라지고, 은행원은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장난을 하는 거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진정군 선생은 장난이 아니었다. 다음날, 다음날도 찾았고, 100일째 되는 날은 그는 지점 전 은행원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 지점에만 갈 것이 아니라 서울의 각 지점을 다녀야겠다고 생각을 했지.” 진정군 선생은 그렇게 서울 곳곳에 위치한 서울은행 지점을 찾아다녔다. 매일 10시라는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먼 지점에 갈 때면 일찍부터 서두르기도 했다. 그렇게 서울에 200여 개의 지점을 다 다니면서 서울의 곳곳을 직접 보고 알게 됐다. 도로가 망가진 곳, 안내표지가 잘못된 곳,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곳 등에 대해서 메모해 두었다가 매일 10개씩 시정모니터에 올렸다. 그런 활동 덕분에 그는 서울시의 최우수 모니터요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진정군 선생은 10원이 가져다 준 행운의 하나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서울은행이 IMF때 사라지고, 하나은행으로 바뀌게 됐지. 이때를 계기로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지점을 다니기 시작했지.” 진정군 선생은 그렇게 전국 600개가 넘는 지점을 다니면서 10원을 저금하기 시작했다. 각 은행장들은 유명인사가 된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고, 그렇게 주고받은 명함이 쌓이고, 또 이것들이 그의 활동의 증거가 되어서 진정군 선생은 동전모으기로 2008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당시에 제주도에 10원을 저금하려고 비행기를 탄다니까, 사람들은 미쳤다고도 했지.” 전국 각 지점을 다니다보니, 정작 저금액보다도 쓰는 돈이 더 많았다. 조금 모순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이 저축액보다도 인내를 가지고 무언가를 꾸준히 함으로써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행동들을 보고 어디에 있을 누군가가 변화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일이 아니냐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미쳤다고 하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는 “대단하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10이란 숫자에 숨겨진 운명 “서울에 온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지.” 진정군 선생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당시 의사였던 아버지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 일본행을 택했고, 가족들도 이를 따라 일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첫해 아버지는 폭격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생활을 꾸려나가기 힘들어서 좌절하고 있었다. 그때 서울에 있던 먼 친척이 도움을 줘 지금의 용산 근처의 쪽방에 머물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 조용하던 마을에는 싸이렌 소리가 가득했고, 하늘에는 전투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다녔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2학년에서 3학년이 되는 시점이었지. 그렇게 내 공부도 끝났지.” 그렇게 시작한 전쟁은 3년이 계속됐고, 그런 혼란 속에서 어머니와 동생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전쟁고아가 된 진정군 선생은 그때부터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너무 힘들어 군대 입대를 결심하게 되고, 군대에서 전기 관련 기술을 익혔다. 그건 나중에 사회에서 전기회사에 취직하는 데 도움이 됐다. “당시에 전기회사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만만치 않았지. 그걸 분리하기 시작했어.” 진정군 선생은 그렇게 남들보다 일찍 나와 청소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자원들을 분리해 고물상에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아진 2000만원이라는 돈으로는 회사직원들을 위한 직원버스를 구입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기까지 총 6000만원이란 돈을 모아 3대의 버스를 마련해 회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껏 살면서 돌이켜보면 10이라는 숫자는 내게 운명이었던 것 같아.” 진정군 선생은 10년 동안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모든 것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자신의 아내를 만나고, 장인어른에게 결혼승낙을 받기까지도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 들어간 방송통신대학도 10년을 다녔고, 회사에서 직원버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걸린 시간도 1대에 10년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놀다가 버린 금액도 10원 짜리 동전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인정하고 격려해준 것도 10번째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 때였다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도, 10년이란 시간동안 꾸준히 하면 뭔가가 되는 것 같아.” “최근에는 매일 1원씩 늘려 저금하고 있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다 되면 평화통일이 되지 않을까.”(웃음) 현재 그는 하루에 1원씩 늘려 저금을 하고 있다. 첫날에는 1원, 둘째날에는 2원, 그렇게 진행해 온 날이 2508일이 됐다. 진정군 선생은 무궁화 삼천리에서 영감을 받아서 3000일이 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계획이다. 진행해 오던 그 일이 잘 마무리되고,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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