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쾅쾅쾅… 십여 년 만에 연장을 다시 잡으니 못질은 제대로 되지 않고 공연한 땀방울만 연신 쏟아 진다. 예전 같았으면 짜증스럽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즐겁고 흐뭇하기만 하다. 땀의 소중함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나는 십년 반을 청주교도소에서 보내고 재작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세상에 다시 나왔다.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 만끽하고 싶었지만 교도소 문을 나서자마자 주위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유례없는 경기침체와 맞닥뜨려야만 했다. 그래도 ‘좌절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시 주저앉으면 잘해야 노숙자밖에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다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부도를 맞았다. 돈을 받지 못한 인부들이 집으로 몰려와 행패를 부렸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와중에 씻지 못할 죄를 짓게 되었고 징역 12년형을 선고 받았다.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그토록 순식간일 줄이야…. 처음 교도소에 갔을 땐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두 딸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는 정말 성실하게 재소자 생활을 했다. 그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교도소에서 8명이 함께 쓰는 방에 컴퓨터를 놓아주었다. 이때부터 밤잠을 줄여가며 기계와 건축, 설계 공부에 매달려 11개 자격증을 땄고, 2006년부터 3년간 기능경기대회에서 장려상, 금상, 은상을 수상했다. 덕분에 모범수로 인정받아 형기를 1년 6개월 남겨두고 특사로 가석방될 수 있었다.
출소하던 날 지난 십 년간 한솥밥을 먹다 같은 날 나온 동기와 함께 새 출발을 다짐했다. 그러나 돈 한 푼 없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세상에 돈 없으면 되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함께 고민하던 동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아, 맞다. 우리 거기 한번 찾아가보자. 출소 전에 교도소 취업전담반에서 서울일자리플러스센터라고 소개해줬잖아. 가면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왜 그 생각을 뒤늦게야 했을까. 우리는 무작정 센터를 찾아갔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더니 센터에서는 우선 창업교육을 받도록 권해주었다. 그리고 교도소에 연락해 나의 성실한 재소생활과 자격증 취득 사실 등을 확인한 후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까지 했다.
어떤 말로 그 고마움과 자신감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울시에서 지원받은 3천만 원의 창업 자금으로 종합인테리어 회사를 차리고 얼마 전 사업자 등록을 마쳤다. 이렇게 사무실을 얻어 직접 리모델링을 하고 있자니 긴 악 몽에서 이제야 깨어난 것만 같다.
“아빠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제는 존경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오늘 아침 둘째딸의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딸들을 만나는 주말이 기다려지고 “힘 내라!”는 전화 한 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딸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결혼한 큰딸에게 동생을 맡겨 놓았지만 곧 함께 살자고 손가락도 굳게 걸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망치를 더욱 힘차게 다잡아 쥐었다.
송**(남, 4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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