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원하는 작은 손길

admin

발행일 2009.12.15. 00:00

수정일 2009.12.15. 00:00

조회 3,749

거리를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돌아보면 언제나 춥고 어두운 곳에 서 있는 빨간 자선냄비와 구세군. 언젠가부터 연말을 알리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린 그들은 누구일까. 정작 너무나 친숙한 그들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에는 50년이 넘는 세월을 구세군으로 활동해 온 박달용 사관을 소개한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꿈꾸다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덕수궁 대한문 앞. 빨간 구세군 자선냄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변 군악대의 연주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천 원짜리 지폐를 들고 빨간 냄비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한 아이에 집중해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걸어가 자선냄비 안에 돈을 넣었고, 재빨리 어머니의 품으로 도망치듯 달려가 안겼다.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볼을 만져주면서 칭찬을 해 주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은 사람들을 미소 짓게 했고, 저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풍경 속에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 그가 오늘 주인공인 박달용 사관이다.

"광복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4살이었습니다." 박달용 사관(78)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네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다. 당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선택이었지만, 그것도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은 해방과 동시에 10년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향은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박달용 사관의 가족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려 했으나, 생각만큼은 쉽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일가친척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배고픔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교회에 가면 따뜻하고, 먹을 것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었죠." 어린 시절의 그는 고모의 손을 잡고 근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고, 박달용 사관은 음식을 먹으면서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다녔던 교회는 개척교회라는 곳으로, 종파를 떠나 오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교회였다. 그는 언젠가는 자신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게 된다.

"언젠가 몸이 많이 아팠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처지여서, 어머니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저를 안고 교회로 달려갔던 것 같아요." 과거에는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병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고, 종교적인 믿음이 강해서 절이나 교회에 아이를 맡기면 그 아이는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픈 아들을 구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교회에 맡겼고, 그리하여 그는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가 처음 한 일은 교회에서의 허드렛일이었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봉사자들을 따라 다니면서 그가 보게 된 것은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 받는 이웃들이었다. 그는 주변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스무 살에 사관이 되었습니다. 그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 생각됐죠."

한때 장의사 사관이라는 별명도 붙어

"당시에는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그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을 절망에 빠져 보내야 했죠." 박달용 사관은 사람들이 외롭게 죽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마지막을 도왔다. 그는 장례는 물론이고, 전문가가 아니면 하기 쉽지 않은 염도 직접 했다. "사관이 된 이후에 장례식에만 찾아다니다 보니 장의사사관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죠." 그가 지금까지 장례를 직접 진행하거나 본 것만도 이미 500여 건이 넘을 정도다. 그는 마지막에 편안하게 눈을 감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그들이 정말 편안한 곳으로 가기를 바란다. 그런 그의 마음은 단순히 여기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사람들이 변하길 바라며 많은 강연을 하러 다니기도 했고, 그 자신도 좀 더 힘든 곳에 자신을 두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60년대 안동에서 장질부사(장티푸스)라는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장질부사의 경우에는 전염력이 강해서 그 집 근처에 새끼줄을 쳐서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도 밥도 먹고, 물도 먹어야 살 수 있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냥 그걸 한 겁니다." 박달용 사관은 겸연쩍은지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는 이후 5년간 군산에서 폐결핵 환자들을 돕는 일도 했다. 폐결핵 환자들이 각혈을 할 때에도 그 가운데서 고통스러운 그들을 위해서 뭔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는지 고민했다고. "당시에는 두려움 없이 했죠. 그래서 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그는 대원각 호텔에 화재사고가 났을 때도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뛰어나가 그들을 도왔다. 가슴이 아팠지만, 거기에서 머물 수 없었다. 미약하게나마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구세군(救世軍)의 뜻이 세상을 구하는 신의 군대라는 뜻이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각박해지고, 살기 힘들어질 때마다 구세군이 할 일은 더욱 많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는 구세군에서 정년을 보내고, 미국 본영으로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7년간의 봉사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자선냄비는 사랑과 마음을 담는 그릇

"어려울 때일수록 자선냄비는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 같아요." 그는 오랜 세월 자선냄비 사업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풍요로운 시절보다는 어려울 때 모금액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세월이 각박해질수록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더 힘든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가진 조그만 것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 마음 속의 소중하고 값진 본성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고.

"자선냄비에는 돈이 아니라 사랑을 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냄비를 열어보면 그 안에는 동전, 지폐는 물론이고, 비행기티켓, 헌혈증, 편지 등도 들어 있죠." 많은 사람들이 자선냄비에는 돈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안에는 돈보다도 값진 물건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것을 박달용 사관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한번은 황금열쇠가 들어 있어서 모두가 놀란 적도 있죠." 사람들은 연말에 다양한 시상들이 열리고, 그때 받은 상품으로 받은 것을 구세군 냄비 안에 넣은 것이라고 추측했다. 값비싼 것을 넘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에 놀란 것이었다.

"희망에 대해서 많이 말을 합니다." 그는 이제 오랜 경험을 토대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가 매번 반복하는 주제는 희망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져야 하는 건 희망이고,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최근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 자주 간다. 그는 거기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열정을 가지고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는 구세군에서도 힘든 일을 도맡아 처리해 '불도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서 이야기를 끌어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그것을 자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박달용 사관은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남을 도우면서 즐겁게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란다.

시민기자/김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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