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피를 가진 남자

admin

발행일 2009.11.24. 00:00

수정일 2009.11.24. 00:00

조회 5,606

최근 신종플루로 인해 헌혈자가 급감하면서, 혈액원의 혈액저장고가 텅 비었다고 한다. 혈액저장고의 비축량은 보통 일주일분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평균 0.5일로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 이에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응급환자들은 혈액이 부족해서 치료시기를 놓치는 것은 물론 귀한 생명까지 잃고 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헌혈을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 서울에서 헌혈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이번 인터뷰는 이런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우연히 시작한 일, 이젠 더 없는 보람 느껴

"그럼 토요일 오후 4시에 뵙도록 하죠."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지금까지 522회를 헌혈한 황의선(58) 예비역 원사였다. 전역을 했지만 아직까지 절도 있는 음성이 목소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어 토요일 오후가 되야 만날 수 있었다. '신촌연대앞 헌혈의집'에서 만난 황의선 씨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편안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1975년 쯤인가 용산역에서 이상한 버스를 봤어요. 호기심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버스에 쓰여 있는 문구를 봤죠." 당시 황의선 씨는 첫 휴가를 받아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용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한 버스가 한 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버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기에는 '당신의 헌혈이 새 생명을 살립니다'라는 글과 함께 'O형 급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는 O형이었고, 잠시 망설이다가 버스에 올랐다. "당시에는 헌혈을 하면 죽은 사람도 살리는 거라 생각을 했었죠."(웃음)

"처음 헌혈을 하고 나서 몸과 마음이 무척이나 가벼워졌어요. 그 느낌을 잊지 못하죠." 당시 황의선 씨는 부사관으로 임관해서 2년간 군생활을 하고, 중사 진급과 함께 받은 첫 휴가였다. 그는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들뜬 마음과 함께,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헌혈을 하게 됐다. 그는 헌혈을 하면서 힘든 훈련을 하면서 느꼈던 뿌듯함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당시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그 이후로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 시간은 30년을 훌쩍 넘었다.

"지금까지 헌혈을 한 횟수로 치면 522회 정도 됩니다. 90년 이전까지는 전혈을 했지만, 이후에는 주로 성분헌혈을 했죠. 성분헌혈은 2주에 한 번씩 할 수 있습니다." 황의선 씨는 현재 전혈 94회, 성분헌혈 428회를 했다. 전혈은 피의 전부를 채혈하는 것이고, 성분헌혈은 혈액에서 일부 성분만을 분리해서 채혈하는 것을 말한다. 전혈을 할 경우에는 피가 만들어지는 일정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 달에 한 번밖에 못하지만, 성분헌혈은 2주면 다시 할 수 있다고.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헌혈

"한번은 헌혈을 하는데, 간호사분께서 기름진 음식을 드시고 오셨죠? 그러는 거에요. 사실 그 전날 고기를 먹었거든요. 너무 신기해서, 어떻게 알았어요, 라고 물었죠." 당시 그는 피만 보고 자신이 뭘 먹고 왔는지 아는 간호사가 신기해서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랬더니, 간호사는 피의 탁한 정도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헌혈을 하기 전에 목욕재계는 물론이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데, 조금이라도 지저분하게 해서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술, 담배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헌혈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는가 보다.

"헌혈의 집에서 어느 아주머니께서 헌혈을 하고 계시길래 인사나 할 겸 말을 걸었어요. 그랬더니, 헌혈이 집안의 평화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겁니다." 그는 무슨 사연인가 궁금해 물었다고 한다. 그녀는 술과 담배를 즐기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둘 다 끊었는데, 그게 헌혈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늦게 헌혈을 시작한 남편은, 좀더 깨끗한 피로 다른 사람들이 건강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술과 담배를 끊은 것은 물론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됐단다. 그녀는 가정의 행복이 헌혈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피를 뽑는다는 것이 두렵지만 그날 용기를 냈다는 거였다.

"건강해서 헌혈을 할 수 있는 건, 다행이면서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건 가슴으로 하는 일이라서, 무엇보다도 보람된 일이기도 하죠." 황의선 씨는 헌혈이라는 것이 단순히 채혈을 해서 필요한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분명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건 마치 촛불로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이 생명을 나눠 주는 일이라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한번 헌혈을 해 보면 제가 왜 헌혈의 매력에 빠졌는지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웃음) 그는 지금 헌혈을 할 수 있는 자신의 건강에 고맙고,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나라 성인남자 10%만 1년에 한번 헌혈을 하면 돼

"헌혈을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제 개인적인 경우에는 몸이 더 좋아진 거 같아요. 약간의 고혈압이 있었는데, 헌혈을 하고 많이 좋아졌죠. 이제는 마라톤도 합니다." 황의선 씨는 나이가 들면서 고혈압 증세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는데, 헌혈을 하면서 혈압이 조절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식성이 바뀌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도 몸이 무겁지 않다고 한다. 또 얼마 전부터는 건강 유지를 위해서 새롭게 마라톤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프마라톤을 뛰었는데, 이제는 마라톤 풀코스를 4시간에 완주할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헌혈은 17세에서 65세까지 할 수 있다고 해요. 지금 58세니까. 앞으로 7년은 더 할 수 있는 거죠." 그는 나이가 많아서 가족들이 걱정을 하지 않느냐는 말에, 헌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한다. 다만 시작이 두려워서 그렇지 한 번 하게 되면 그 즐거움을 알게 된다고. 다만, 꾸준히 헌혈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건강관리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얼마 전에 집에 있는 헌혈한 카드를 모아봤는데, 250여 개가 됐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소아암협회에 기증을 했죠. 또 올해 3월에 보니까 85매가 또 있어서 어린이들을 위해서 기증했습니다." 황의선 씨는 수많은 헌혈을 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헌혈카드는 한 장도 없다. 다들 주변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증을 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카드가 증서라고만 생각을 해서 집에 하나 둘 쌓아두기만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것도 소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증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필요한 혈액량이 340만 명분이라고 해요.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라고 하고, 그 중에서 반만이라도 1년에 한번만 헌혈을 하면 피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우리나라는 매년 혈액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신종플루와 같은 전염병이 생기면, 수입도 원활하지 않아서 혈액을 필요로 하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게 된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절반 정도만이라도 1년에 한번만 헌혈을 하게 되면, 혈액을 자급자족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헌혈의 좋은 점을 알리고 싶어요. 또 함께 하게 된다면 더 기쁠 겁니다."

그의 팔은 수 백 번의 헌혈로 인한 주사자국이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 적도 있지만, 한번도 그는 그걸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매번 헌혈을 할 때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한 번 헌혈을 하면 누군가 한 명이 살아난다고 생각을 할 뿐이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면서 수백 명을 살린 영웅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민기자/김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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