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이야기가 수없이 묻혀 있는 `골방`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3.28. 00:00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
[서울톡톡] "왜 현재의 이야기가 아닌 과거의 역사를 쓰는가?"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숱하게 들어온 질문이다. 어쨌거나 현대에 살아가는 작가로서 당대의 인간과 삶을 탐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내게 역사는 지나간 시간,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여러 겹의 패스추리 빵처럼 낱낱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다. 한입에 베어 물면 그 겹겹의 맛이 하나로 느껴진다. 바삭,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두툼하게 씹힌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울 때, 역사는 지루한 연대기만 같았다.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676년 신라의 삼국 통일, 918년 왕건의 고려 건국,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연대표로 줄줄 외운 역사는 시간 속에 돌처럼 굳어 묻혀 있는 화석 같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고 자꾸 헷갈리기만 했다.
철학자 니체는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에서 역사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기념비적 방식으로, 과거가 다시 한 번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두 번째는 골동품적 역사관으로, 과거를 방부 처리해 박물관에 전시하려고만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비판적 방식으로,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과거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에 과거와 대립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전(前)세대가 역사를 배운 방식은 두 번째에 가까웠다. 그래서 과거를 복원하거나 해체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역사는 우리의 삶에서, 현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역사를 쓰는 손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가 역사가의 손이라면 다른 하나는 문학가의 손이다. 작가는 사실 자체를 넘어서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욕망을 찾아낸다. 그때 역사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서사의 보고가 된다. 감각만이 남고 서사가 실종된 시대에 작가가 매혹적인 이야기가 수없이 묻혀 있는 보물창고 같은 골방을 뒤지고, 이야기에 목마른 독자들이 그 작가의 손끝에 이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와 미래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것은 곧 역사를 '상상'하는 일이다. 나는 현실의 누추한 보자기 틈새로 끊임없이 되풀이됨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과거를 본다. 신라 왕실의 여인, 조선의 음남탕녀, 식민지시대의 모던 뽀이가 내 상상 속에서 살아 숨 쉰다. 그들과 같이 경주 월성을 거닌다. 한양의 뒷골목을 누빈다. 경성 시내를 인력거를 타고 달린다.
그들과 함께하는 상상이 즐겁기도 하거니와 그들의 손을 종내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는 언젠가 우리도 그들처럼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과 보존만으로는 상상과 공감의 감성을 얻을 수 없다. 먼지가 아닌 보석이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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