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독도서관 마당에 이렇게 많은 유적이?
발행일 2012.02.24. 00:00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무심코 들렀던 정독도서관 앞마당엔 여러 개의 표지석이 있다. 성삼문 선생이 살던 곳, 화기도감터, 김옥균 집터와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 기념비까지. 구석구석 둘러보면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 역사의 숨결이 다시금 따스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역사의 격변기에는 그 역사를 주도한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 말기 사회는 내부적으로는 봉건체제 붕괴에 따른 혼란이 팽배했고 외부적으로는 구미열강들의 통상 요구와 침략위협이 더욱 심했던 시기다. 1882년인 고종 19년, 구식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불러들인 청나라군대 3천명이 조선에 주둔했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 하기 위한 내정간섭을 노골화 한다.
이런 격변기에 10여 년 전부터 개화사상을 키우며 청나라로부터의 완전독립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으로 부국강병을 꿈꿔왔던 개화당들이 거사를 일으킨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은 고균 김옥균이다. 비록 3일천하로 끝난 실패한 혁명이었고, 후세의 평가도 엇갈리고 있지만 갑신정변의 주인공이 살았던 옛 집터를 찾아보는 마음은 자못 숙연했다.
도서관 주차장에서 겸재 정선 기념비를 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안국동 사거리 쪽으로 향했다. 잠깐 걷자 풍문여고 앞이다. 방향을 다시 오른쪽으로 바꿔 넓지 않은 골목길을 걷는다. 그렇게 400여 미터, 약간의 오르막길을 거슬러가면 길가에 늘어선 올망졸망 작은 가게들의 모습이 정겹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고즈넉한 골목이다. 그렇게 걷다보니 정독도서관 입구가 보인다.
넓은 도서관 앞마당에 조선 후기 양반화가였던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 기념비가 있다. 정선의 인왕재색도는 비온 후 갠 날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실경산수화로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도서관 입구 축대 아래엔 ‘정독도서관’, ‘서울교육박물관’, ‘성삼문선생 살던 곳’, ‘화기도감 터’, ‘중등교육발상지’ 등의 안내판과 표지석이 줄지어 서있다. 한곳에 이렇게 많은 유적들이 모여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오르막길 앞쪽에 ‘서울교육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왼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맞은편에 옛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정독도서관이 서 있다. 그 마당 오른편에 웅장하고 멋스런 한옥건물 한 채가 발길을 이끈다.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 기념비 동쪽에 웅장하게 서있는 한옥건물은 서울유형문화재 제 9호인 종친부와 옥첩당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실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곳이다. 선왕들의 어보(임금의 도장)와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옷도 이곳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종친부 오른편에는 ‘중등교육발상지’ 기념비와 ‘경기고등학교 이전기념비’가 서 있어서,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현대식 중등교육의 발상지이며 옛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독도서관 마당에서 갑신정변을 떠올리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의 집터 표지석은 인왕재색도와 종친부 건물 중간지점 약간 남쪽화단에 서있다. 표지석에는 ‘김옥균 집터, 조선말 개화파의 지도자인 고균 김옥균이 거처하며 갑신정변을 논의 하던 집터(종로구 화동 260번지)’ 라고 쓰여 있다. 마침 도서관을 산책하고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김옥균, 갑신정변의 주인공 아닙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을 등에 업고 거사를 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과 근대적인 개혁을 하려했다는 뜻은 좋았지만 일본이라는 또 다른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친일파잖아요”, “그래도 그의 개혁사상은 높이 평가합니다. 아쉽게도 결국 일본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했지만”
역사의 평가는 언제나 엇갈리기 마련이다. 김옥균(1851~1894)은 공주에서 당시의 세도명문가 안동김씨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당숙인 김병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21세인 187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과 교류하며 근대적 개혁을 위한 개화사상을 형성했다. 결국 1884년에 거사에 돌입했지만 겨우 3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에 하나의 계기가 된 운동이었다. 우리 근대사에서 그 뒤에 일어난 거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의 기반 위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망명을 거듭하지만 결국 상하이에서 자객에 의하여 암살당한다. 그가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완전독립과 근대적 개혁을 꿈꾸며 논의했던 집터, 정독도서관 마당에는 초라한 표지석 하나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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