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현장에서 발견한 서울의 아름다움

시민기자 신현근

발행일 2010.10.06. 00:00

수정일 2010.10.06. 00:00

조회 2,296


가을은 더디게 왔다 빨리 가는 계절이다. 엊그제까지 한낮은 여름이었지만 추석이 지나고 나자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차가워지고 있다. 얼마 아니 가서 하얗게 서리도 내리고 나뭇잎이 붉게 물들면서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더위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피서여행 한번 떠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뭔가 아쉬움 속에서 이 가을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가을이 가기 전에 문화향기 넘치는 서울투어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떨까.

지난 9월 17일 강서구 가양동 소재 겸재정선기념관 주최로 ‘겸재 정선의 그림 속 현장을 찾아가는 투어’가 열렸다. 그 동안 겸재정선기념관에서는 개관 1주년을 맞아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완성자인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가 겸재 정선의 생애와 미술을 알리는 여러 가지 행사를 전개해 왔다. 8월 19일부터 9월 16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5회에 걸쳐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도'를 통해본 ‘조선 후기 선비들의 멋스러운 삶’이란 주제로 각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 5주간 교육강좌를 개최한 바도 있다.

겸재 정선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가장 알맞은 진경산수화를 확립시켜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한 화성(畵聖)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1000원짜리 지폐 뒷면에 정선의 '계상정거도'가 수록된 것만 봐도 그의 화가로서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투어는 겸재정선기념관에서부터 시작됐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이태호 교수가 투어 해설을 맡았고 40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여했다. 현재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일대는 정선이 65세부터 70세까지 만 5년 동안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아(陽川懸衙)가 있던 자리다. 답사단은 먼저 기념관에 전시된 양천현아의 모습과 정선의 작품을 감상하고 직접 옛 양천현아가 있던 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현대식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선 동네 한가운데 양천현아지(陽川懸衙址)라는 조그만 비석만이 그곳이 옛날 양천현아가 있던 터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럽을 여행할 때 천년에 가까운 중세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불과 2~3백년 전 건물 하나 제대로 보존하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양천현아지에서 내려왔던 길로 다시 올라가면 바로 궁산 산책로로 연결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차 넓게 시야에 들어오는 한강의 아름다운 모습에 금방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겸재기념관장 이석우 교수는 “이번 여행은 겸재의 그림을 이해하는 동시에 서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여행도 될 것이다. 서울은 본래 풍광이 빼어난 곳이지만 그 풍광을 완성시켜 준 사람이 바로 겸재 정선이다. 겸재가 양천 현감으로 있는 동안에 한강과 서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그림으로써 서울의 자연을 절경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동네 뒷산이라 할 수 있는 야트막한 궁산을 조금 걸어 올라가자 우거진 숲 사이로 아담한 정자 하나가 보인다. 한강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는 소악루(小嶽樓)다. 현재의 소악루는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한강변 경관과 조망을 고려하여 1994년 신축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누각에 오르자 서쪽으로 안산과 인왕산, 동쪽으로 남산, 남쪽으로 관악산 등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강의 물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등 서울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펼쳐진다. 소악루에 올라서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소악루 난간에 걸터앉자 한강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 있는 신선과 같은 겸재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소악루와 궁산의 정상에서 한강과 서울의 아름다움에 취해 오전 시간을 보냈다.



겸재가 사랑했던 인왕산을 보는 감격

오후에는 겸재가 즐겨 화폭에 담았던 인왕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배화여자대학으로 향했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 중 하나다. 조선 초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 남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았다는 조선조의 명산이다. 인왕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그 중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의 수많은 그림 중에서도 '금강전도', '박연폭포'와 더불어 3대 대표작으로 칭하는 '인왕제색도'는 여름날 소나기가 지나간 후 북악산 등성이에서 바라본 인왕산을 그린 것으로 겸재 특유의 장쾌하고 호탕한 필법이 잘 나타난 걸작이다. 하지만 인왕산의 겉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에 비친 인왕산을 표현했다. 겸재의 그림을 진경산수화라 한 것도 그처럼 눈에 비친 바깥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에 들어온 순수한 자연을 그렸기 때문이다. 배화여자대학교 건물 옥상에 올라서니 겸재의 '인왕제색도'에 나온 인왕산 바위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서울의 도심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서울이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 속에 안겨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라워했다. 겸재정선기념관에서 2년째 안내원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홍금실(61) 씨는 “그림 속에 나오는 현장을 실제로 와서 보고 겸재의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더 실감 있게 겸재의 그림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감동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학고재에 전시된 진본 '박연폭포'를 감상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박연폭포'는 겸재 특유의 감성적인 화풍이 유감없이 나타난 그림으로, 특히 음과 양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태호 교수는 '박연폭포'를 처음 보는 순간 너무도 크고 우렁찬 폭포소리에 놀라서 뒤로 벌떡 넘어지고 말았다는 우스갯소리로 이 그림을 해설하기 시작했다. “그림 값이 얼마나 갈까요?” 이교수의 해설이 끝나자 누군가가 물었다. “대답은 ‘값이 없다’입니다.” 이교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아마 경매 시장에 내놓으면 백억에도 불티가 날 겁니다.”

이번 ‘겸재 정선의 그림 속 현장을 찾아가는 투어’는 화가로서의 겸재의 진가를 알리려는 취지로 기획됐다. 비록 겸재정선기념관에서 주최하는 투어는 끝났지만, 겸재의 그림 속에 나오는 서울의 아름다운 자연을 답사하는 감동적인 체험은 주최나 시기와 상관없이 언제나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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