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단 하나, 양천향교와 소악루

admin

발행일 2010.03.08. 00:00

수정일 2010.03.08. 00:00

조회 3,147

전국에 234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면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 500년의 도읍지인 서울에는 몇 개의 향교가 남아 있을까? 향교는 조선시절 유학을 가르치던 지방교육기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울에는 단 한 개의 향교가 남아 있었다. 바로 강서구 가양동 궁산 자락에 있는 양천향교다.

서울시 기념물 8호인 양천향교는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서자 도로 입구에 ‘양천향교’ 가는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도로 중앙화단에는 ‘양천현 관아터’를 알리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조선시대 양천현 관아가 있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도로를 따라 조금 나아가면 야트막하게 솟아 있는 궁산으로 직접 오르는 오른편 길과 곧장 가면 ‘궁산근린공원’ 입구와 겸재 정선의 기념미술관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편 궁산 쪽으로 잠깐 올라가자 맞은편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향교 앞에 홍살문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입구인 외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좌측에는 역대 현감과 현령들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들이 모여 있는데, 1988년도에 향교를 중수하면서 지방 유림들이 주변에 있던 것들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그 아래쪽은 전통문화행사와 민속놀이를 하는 ‘유예당’ 건물이 아담하고 예스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향교는 조선 개국 후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길 때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조선왕조는 유학을 국시로 정하고 유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기관을 크게 확장하여 한양에는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산하에 지역에 따라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을 세웠는데 이를 4학이라 불렀으며 중앙에 설치한 향교와 같은 교육기관이었다.

4학도 향교와 같이 태종 11년에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고종 31년(1894)에 폐하였다. 향교나 4학, 성균관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립교육기관으로 과거를 통해 등용할 선비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한양에는 향교 대신 4학이 있었으니 오늘날 서울 지역에 향교가 없는 것은 당연한 셈이다. 지금은 서울 땅이지만 당시는 김포 지역을 관할하던 양천현에 세워져 ‘양천향교‘라는 이름이 붙은 이 향교는 태종제위 기간인 1411년에 중앙의 4학과 함께 세워졌으니 600여 년의 오랜 연륜을 가진 문화재 중의 하나다.

건축물은 맨 위쪽에 자리 잡은 대성전을 비롯하여 전사청, 내삼문, 그리고 중간에 서있는 명륜당, 동재, 서재, 외삼문과 부속건물 등 8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삼문 안의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 주돈이, 정이, 정호, 주희 등 송조 4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 18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전사청은 제사용품을 보관하고 음식준비를 하는 특별하게 사용되던 건물이다.

유학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으로서의 향교의 기능은 구한말인 고종 31년에 과거제도 폐지와 학제 개편으로 소멸되고 문묘기능만 남았다. 그러나 근래 들어 우리문화와 전통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곳 양천향교 명륜당에서 특별한 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향교를 돌아보고 나오다가 명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훈장님과 학생들을 만났다.

훈장님은 올해 89세인 오남주 옹이었는데 올해로 27년째 사서삼경과 전통예절, 그리고 붓글씨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나온 어린이는 사자소학을 공부하는 명우민(11세) 어린이로 염창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다. 훈장님과 엄마 박혜란(35세) 씨와 함께 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민이는 한자공부와 전통예절, 그리고 붓글씨 공부가 매우 재미있다고 한다. 두 명의 아이들과 함께 온 다른 엄마도 이곳에서의 자녀들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현재 이 향교의 전통교육 수강생은 10명이라고 한다.

양천향교를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궁산에 올랐다. 궁산은 양천향교 뒤편에 해발 74.3 미터 높이로 야트막하게 솟아 있는 산이다. 산 위로 오르는 산책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궁산이라는 이름 외에 성산, 관산, 파산이라고도 불렸던 이 산에는 백제시대에 쌓은 양천 고성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고, 조선조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겸재 정선이 바로 이곳 양천 현령으로 재임할 때 그림을 그렸던 정자 소악루가 날아갈 듯 서있었다.

조선시대의 화성이라 일컬어졌던 겸재 정선은 64세 때인 1740년 가을 이곳 양천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재임 5년 동안 매일같이 이곳에 올라 한강변의 아름다운 절경을 화폭에 옮겨 그렸다. 겸재가 이곳 정자에서 그린 ‘한수주유도(漢水舟遊圖)’는 오늘날 한강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정선의 호는 겸재, 원백, 난곡 등 세 개나 되며 초기엔 중국 남종화를 답습했지만 30대 이후 독자적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였다. 그는 우리강산의 아름다움을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그려냄으로써 후세에 화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소악루는 중국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 경치와 버금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조 13년인 1737년에 동북 현감 이유가 처음 건축했다고 전한다, 소악루에 오르자 멀리 남산과 북악산, 인왕산 등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발아래 한강과 난지 하늘공원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소악루에서 조금 더 걸어 올라가자 ‘관산 성황사’가 울타리 안에 감싸여 있다. 그 위쪽에 궁산 정상이 펼쳐져 있었다. 지리측량용 삼각점과 멋진 소나무들이 서있는 궁산 정상 한쪽에 조성된 전망대에 올라서자 신공항철도와 방화대교, 행주산성 등 서울 서북쪽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운동기구들이 비치되어 있어서 인근주민들의 산책과 건강관리를 하는 쉼터가 되고 있는 궁산은 임진왜란 때는 행주산성과 더불어 의병들의 집결장소였다고 한다.

서울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천향교 주변에는 소악루가 있는 궁산근린공원,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의 기념미술관이 있고, 의술의 대가였던 허준 박물관도 가까운 곳에 있어 함께 둘러보면 매우 좋은 곳이다. 지하철 9호선 2번 출구에서 걸어서 7~8분 정도 거리에 있다.

시민기자/이승철
seung8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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