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잊으랴~ 지하독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admin

발행일 2010.02.25. 00:00

수정일 2010.02.25. 00:00

조회 4,096

야구 시즌이 되도 전혀 열광하지 않는 A양도, 축구라고는 박지성밖에 모르는 B군도, 온 경기 내내 손에 땀을 쥐며 응원하는 경기가 있다. 한국 국민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보며 응원하는 ‘한일전’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한일전은 어떠한 종목이든 피흘리는 투혼을 발휘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다. 일제시대, 유관순 누나, 독립운동 등의 말들은 고리타분할 뿐 아니라 먼 옛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증오는 일본이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집회를 하는 위안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매년 3월 1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닌, 우리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는 날이다. 삼일절을 맞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에 지어져 80여 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탄압기관이었다.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다. 이 때문에 1912년 9월 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이곳은 서대문형무소(1923년), 경성형무소(1946년), 서울형무소(1950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67년) 등 격변하는 현대사 속에서 명패를 수차례 바꿔달았다. 그 과정에서 김구,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을 거쳐 갔으며, 광복 이후에는 10.26사건을 일으킨 김재규, 위장 귀순간첩 이수근 등이 여기서 최후를 맞았다.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 15일에 현재의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현재는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생각해 7개 동만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그 중에서 옥사 3개동과 사형장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3·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사와 고문실로 쓰이던 역사전시관에는 영상자료실,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재현한 매직비전, 형무소역사실,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벽관·독방 등의 옥중생활실 등이 있다. 이밖에 사형장 옆에 시신을 몰래 버리기 위해 만든 시구문이 복원되어 있다. 시구문은 최근에 발견되었는데, 200미터 정도 되는 굴 중 40미터만이 복원되었다. 일제는 시신을 이 굴을 통해 뒷산에 버렸다.

추모의 장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형무소를 영상을 통해 보고 그 분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장이다. 영상실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관람하기 앞서 이곳의 변천 과정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으며, 서대문형무소의 상징인 정문, 망루, 옥사, 사형장 등을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획전시실은 조선광복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다가 순국하신 선열들을 선양하기 위한 기획전과 서대문형무소와 관련한 전시공간이다.

체험의 장
폭력과 고문으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신음이 아직도 들려오는 곳이다.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인은 일본 법규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그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고 협박하면서 잔혹한 고문과 구타를 했고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다. 고문의 종류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형장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후 사형이 집행된 장소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조국 자주독립의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애국선열들의 넋이 서려 있는 곳이다.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형장 안과 밖에 똑같은 나무를 같은 시기에 심었는데, 밖에 있는 나무는 크고 울창하게 자란 반면 사형장 안에 있는 나무는 애국지사들의 한이 서려있기 때문인지 작고 보잘 것 없었다.

여성지하옥사
일제는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을 투옥하기 위해 1916년 여사를 신축하였다. 지하에는 독방을 설치해 비중이 있는 애국지사들을 수용하여 가혹한 신문과 고문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 뒤 1934년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매립하였던 것을 1992년 발굴 복원하였다. 특히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 굴’이라고도 한다.

망루와 담장
투옥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망루와 담장의 일부를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1907년에 담장을 설치할 때 나무기둥에 함석을 붙였으나, 현재 붉은 벽돌담은 1923년 설치되었다. 담장의 높이는 4.5m, 길이는 1,161m였으나, 지금은 앞면 79m, 뒷면 208m가 남아 있다. 망루는 총 6개소 가운데 2개소만 남아 있고, 높이는 10m다.

삼일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보면 어떨까? 잊고 싶은 과거이기도 한 일제시대이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 시대를 걸어왔던 우리 조상들의 넋을 위로하고,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게 한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을 그 안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위 치: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설날, 추석
- 문 의: 02)360-8590, www.sscmc.or.kr/culture2


■ 주변에 가볼 만한 곳 … 서대문독립공원

독립문은 서재필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가 주축이 돼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건립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그러나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출입이 통제되었다.
2007년 3월에는 독립문 주변에 1만㎡ 규모의 독립광장이 조성되어 시민 누구나 가까이에서 독립문의 모습을 감상하고 독립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잘못된 공간 설계로 무질서하게 배치돼 있던 독립문과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관, 형무소역사관 등 공원 내 각 시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한편, 독립공원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던 수경시설 등 일본식 조경은 우리나라 전통 조경양식인 방지(네모난 형태의 연못)로 새롭게 바꾸고, 산책로도 황토경화와 화강석 판석으로 새로 포장했다. 독립공원은 독립광장과 전통연못을 비롯해 독립문, 독립관, 3·1운동 기념탑,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순국 선열 추념탑, 이진아 도서관, 어울쉼터가 어우러져 있는 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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