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에도 토박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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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19. 00:00
시민기자 김용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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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뭇개’. 옥수동의 옛 이름이다. 동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남한강 물줄기와 동북 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한천(청계천 냇물)의 두 물줄기가 이곳에서 합쳐진다고 하여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식 음사(音寫)로는 두모포(豆毛浦)다. 일제 초기까지만 해도 두모동, 두모리 등으로 불려 왔던 이곳이 지금의 옥수동이란 이름으로 된 것은 1936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옥수정(町)이라 한 것을 광복 이후 우리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 마을 339번지에는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었기에 ‘옥정숫 골’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고장 앞을 흐르고 있는 강은 동호(東湖)라 하여 ‘한강 8경’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경치가 좋아 조선시대 때엔 권세가들이 앞 다투어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였다. 강변 경관이 아름다운 것으로는 소문이 나서 유하정(流霞亭), 황화정(皇華亭) 등 궁실은 물론 김안로의 보안당(保安堂), 정유길의 몽뢰정 (夢賚亭), 조선조 말 조대비가 태어난 쌍호정(雙虎亭) 등 개인 별장도 부지기수로 많았던 고장이다. 옥수동 건너편에 있는 압구정도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우고 한껏 권세를 누렸던 당대의 풍운아 한명회가 관직이 삭탁된 뒤 노년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했던 정자가 아니던가. 또 명종 때 권신 윤원형의 첩으로 정경부인에까지 올라 심심찮게 사극에 등장하는 요화(妖華) 난정(蘭貞)이 백성들의 원한을 씻는다며 방생하거나 십여 섬씩의 밥을 지어 고기밥을 주던 곳도 이곳 두뭇개, 두물머리였다. 지금도 이 고장 50대 이상 토박이들은 옥수3동 일대를 ‘한림말’로 부르는데 이는 여기에 있었던 그 유명한 동호 독서당(讀書堂)에서 연유된 것으로 약수동~옥수동 사이 길 이름을 독서당길이라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밖에도 이야기거리는 많다. 아직도 이곳에는 탑골승방(僧房)이라고 불리는 미타사가 비구니 사찰로 현존하고 있는데 이 절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도량답게 단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해방 초기에는 이 마을이 남산의 연봉으로 매봉산과 달맞이봉이 배후로 둘러져 동호(東湖) 강을 내려다보는 삼태기 형국을 하고 있어서 수림 속에 감춰진 피난처로 알려져 귀 소문으로 아는 이들은 6.25 동란 중 난리를 피해 이 고장으로 많이 몰려들었던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물론 그랬던 옥수동 마을은 이제 '마을'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하리만치 옛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게 변했다. 고가철로와 도로가 엉킨 교통의 요지로 바뀌었고, 그토록 유명했던 샘(泉) ‘옹달샘’과 ‘약물터‘는 흔적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동네 앞 동호 강물 근처엔 접근하기도 힘들어졌고, 푸른 옥색 빛깔을 띄우던 청아한 강물과 중간에 가로질러 높게 쌓여 있던 모래톱 섬은 온데간데 없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오로지 좁디좁은 자전거 길뿐이다. 그나마 최근에 자전거 길이 만들어져 다행이라고 할까.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거쳐 성장기를 보낸 동네. 옛 고향의 변모하는 장관 속에서 기자를 보듬어 안았던 여린 정서들이 흘러간 세월과 더불어 종적 없이 사라짐을 오늘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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