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과 동시상영관의 추억 그리고 기형도
admin
발행일 2007.08.09. 00:00
시민기자 최근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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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日常(일상)의 恐怖(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기형도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실린 ‘노을’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89년 봄,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시인은 그렇게 자신이 남긴 시처럼 새벽의 한 심야극장에서 세상과 이별을 고한다. 도서관에서 그의 시집을 읽다가 문득 그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극장이 궁금해졌다. 생명이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죽음을 직시할 때 생명의 참다운 가치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굳이 기형도 시인과의 연관성이 아니더라도 파고다 공원 옆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을 법한 ‘파고다 극장’에 대한 개인적 궁금증도 오후의 짧은 여행을 나서게 된 이유에 한 몫을 했다.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은 극장에 대한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건물이 남아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일단 종로에 있는 파고다 공원으로 발길을 잡았다. 커피 자판기에 붙은 요금이 놀랍게도 "100원". 이곳에 자리 잡은 식당들도 십여 년 전의 시간에 정지되어 있는 듯 가격들이 2천원대였다. 좀 더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니 이발소가 나왔다. 이발 가격이 3천500원.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극장 비슷한 건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파고다 고시원과 올망졸망 붙어 있는 식당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난감해졌다. 지나가는 아저씨를 붙들고 이 근처에 있던 극장에 대해 물으니 오래전에 간판을 내렸다는 얘기를 들려주었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공원 입구가 있는 대로로 나가려던 차에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나오던 할아버지가 눈에 띈다. 파고다 극장에 대해 묻자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며 방금 나왔던 이발소를 가리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동안 이발소 건물을 바라보니 낡은 파이프 관들 위로 먼지에 쌓인 블라인드 창문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 오후의 석양빛이 건물 전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고시원 간판 위로 페인트칠이 벗겨진 파고다 극장의 윤곽이 보였다. 이젠 극장의 간판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극장 특유의 느낌을 뿜어내고 있었다. 노을처럼 저물어가는 낡은 고시원 건물. 한 젊은 시인은 갔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그 장소는 남았다. 이제는 스크린을 통해 지친 자들에게 몇 시간의 자유를 주던 시네마 천국은 아니다. 그러나 저 안에 들어가 지친 몸을 뉘일 고시생들은 또 다른 미래의 영화를 꿈꿀 것이다. 80년대 록음악에 심취했던 젊은이들이라면 파고다 극장에 대해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록의 전당이라고 해도 좋았을 이곳은 애초에는 극장이 아니었다. 84년에 록, 헤비메탈 공연장이 생겼고, 전인권을 비롯, 김종서, 이승철 등 지금 들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뮤지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런 음악의 메카가 동시상영관으로 바뀌게 된다. 이곳에서 태권브이와 007 시리즈를 보았던 추억을 가진 이들이 참 많다. 파고다 극장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보고 싶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잊혀지고 사라진 장소는 우리의 기억 속에 쉽게 증발하나보다.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녹번동을 지나게 되었다. 오래된 극장의 간판이 내려져 있다. 점점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추억의 장소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더 애착이 가고 오랫동안 만나고 싶은 것들은 몇 백 년 전의 문화재라기보다는 바로 성장해 가면서 개인의 삶과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지금 주위에 사라져 가는 7,80년대 상영관들의 사라짐은 아쉬움을 떠나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시인은 갔고 낡은 상영관 건물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의 추억도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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