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실패했다고 인생에 실패한 건 아닙니다”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신운영

발행일 2011.05.09. 00:00

수정일 2011.05.09. 00:00

조회 3,373

노숙인 자원봉사에 흔쾌히 동참해준 마음씨 착한 학생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인문학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밥이나 돈보다 더 실질적인 힘을 줄 수 있을까? 2008년부터 서울시가 노숙인 등 저소득시민을 대상으로 시작한 ‘희망의 인문학’ 수료생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강의를 들은 후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하여 노숙 생활을 청산하는가 하면 자원봉사단체를 조직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지난 5월 8일 오후 2시 40분쯤, 노숙인 출신들의 자원봉사모임인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탑골공원을 찾았다. 어버이날을 맞아 공원에 있는 노인들에게 카네이션과 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들고 온 세 개의 라면 박스에는 직접 만든 카네이션과 빵이 가득 들어있었다.

행사 장소는 공원의 정문. 먼저 모임의 간사인 박태선(65) 씨와 전인중(58) 씨 등 몇 몇이 미리 준비한 티켓 100장을 들고 공원 주변을 돌았다. 예전의 행사 때 빵을 두 번씩 타 가는 노인들이 있어 이번에는 골고루 나누기 위해 티켓을 만든 것이다.

배동효(47) 씨는 공원에 놀러와 있던 학생들에게 카네이션 다는 일을 부탁했다. 투박한 아저씨들 손으로 달아드리는 것보다는 보기 좋은데다 학생들에게 산교육도 될 것 같아 생각해낸 아이디어라고 한다. 행사내용을 이야기하고 30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하자 세 명의 학생이 흔쾌히 동참을 했다.

티켓을 받은 노인들이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상도중학교 3학년 조영호, 형지영 양이 공원 정문으로 다가오는 노인들에게 꽃을 들고 다가갔다. “할아버지 제가 카네이션 달아드릴게요.” 학생들의 말에 노인들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두 여학생에게 행사에 참여한 소감을 묻자 “할아버지들이 좋아하시니까 저희도 기뻐요”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카네이션 다신 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빵 드릴게요.” 김장권(65) 씨와 이상영(58) 씨가 박스에서 빵을 꺼내 노인들에게 건넸다. 이남철(85) 할아버지는 “빵 맛이 아주 좋다”며 고마워했다. 준비해온 빵 100개와 꽃 150여 송이는 10분도 안 돼 동이 났다.

노숙인들이 직접 만든 카네이션과 빵

배씨에게 빵과 꽃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물어봤다. “카네이션은 2주일 전부터 여자 회원들이 틈틈이 만들고 빵은 어제 남자들이 만들었어요. 작년엔 회원 중에 빵 만드는 기술자가 있어 좋았는데 이번에 그분이 없어 고생 좀 했지요. 용산구 동자동의 한 빵집 기술자한테 만드는 법을 다시 배웠어요.” 다행히 빵이 맛있게 되었다며 배씨는 흐뭇해했다.

재료비를 물어봤더니 총 20만원이 들었단다. 회비 내는 회원은 모두 15명 정도인데 이들에게 이 금액은 벅찬 액수다. “서울시에서 마련한 일자리에 나가 받은 돈으로 회비 내는 거지요. 한 달에 59만원 받는 이, 36만원 받는 이… 보통 그 정도 벌어요. 평소 회비는 5천 원인데 이번엔 좀 크게 하느라 회장단은 2만 원, 일반회원은 5천 원 냈습니다.” 배씨는 그래도 한 번도 남의 후원을 받은 적 없이 스스로 벌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며 뿌듯해했다.

회원들에게 소감을 한 마디씩 해달라고 부탁했다. “연세 드신 분들한테 빵 드리고 꽃 달아 드려 행복하다”(김장권). “기분이 좋다. 아버지가 90세인데 농장하신다. 아마 동생이 꽃 달아드렸을 거다. 아버지 생각하면서 준비했다”(전인중). “배고플 땐 빵 하나만 드려도 엄청 좋아하신다. 앞으로도 자주 오려고 한다”(박태선). “어르신들한테 우리가 베풀면 우리도 노인 됐을 때 도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이상영).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은 ‘희망의 인문학’강좌를 함께 들었던 노숙인 20여 명이 함께 만들었다. 2년 전, 강의를 수료하는 날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실패한 것뿐이지 인생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좋은 일 한 번 해보자”는 배동효 씨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탑골공원이나 노숙인 시설, 쪽방촌 등에 빵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 일을 해왔다. 행사는 한 달에 한 번 한다.

회원들은 노숙생활을 청산하고 자립한 사람도 있지만 아직 쉼터에 머물거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자원봉사에는 다들 참여한다. 앞으로는 빵 나누기 행사 외에도 노인요양시설이나 어린이집, 노숙시설에 가서 화장실 청소, 설거지 등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할 계획이다.

모임을 처음 만든 배씨는 말한다. “인간이 망했는데… 쓰러졌는데… 이겨내기가 쉽겠습니까? 계기가 오지 않는 한 힘들어요. 빵하고 밥을 아무리 줘봤자 그것은 연명밖에 안 됩니다. 내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마음의 변화가 와야 하죠. 인문학은 그 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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