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수강생을 만났다

admin

발행일 2009.10.14. 00:00

수정일 2009.10.14. 00:00

조회 2,507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노숙인들 이야기

빛과 그늘의 명암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것일까. 경제적 풍요, 그 뒤편에 빈곤과 절망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숙인들이 있다.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은 문화적으로도 함께 소외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가난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노숙에서 벗어나는 길은 배움과 터득을 통해 스스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12일 저녁, 기자는 영등포에 위치한 노숙인쉼터 '보현의 집'에 다녀왔다. '보현의 집'은 노숙인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교육하는 서울 시내 15개 교육장소 중 한 곳이다. 이곳은 동국대학교와 함께 철학, 글쓰기, 문학, 역사, 예술사 및 현장 체험학습 등 5개 교과목을 선정하여 1, 2학기로 나누어 인문학 강좌를 개설해 운영 중이다.

'보현의 집' 인문학 교육장 안에는 12명의 노숙인이 미리 와서 앉아 있었다. 교육장 바로 밖에는 20여 명이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잡담 중인 그들을 교육장 안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이석주 교수는 자신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식사 맛있게 드셨어요?”라는 일반적인 인사를 건넸더니 한 수강생이 일어서서 “밥 먹는 것 조사 나왔냐?”고 따져서 된통 혼이 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교육 받으러 안으로 들어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들에게는 강요가 될 수 있다. 강요라고 느껴지는 순간, 그들은 쉼터를 떠날 수도 있다. 떠나면 그들은 다시 추운 거리를 배회하게 된다. 때문에 강요로 들릴 수 있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오늘 강의를 준비한 동국대 이석주 교수가 드디어 수업을 시작한다. “이번 글쓰기 강좌는 여러분을 달필로 만들어 문단에 등단시켜 드리려는 게 아니고, 글을 써 보면서 나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기자도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강의실에 동참한다. 뒷자리에서 바라본 수강생들의 어깨는 커다란 바위라도 올려져 있는 듯 힘겹게 보였다. “여러분은 당장 글을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느낌을 글로 쓰는 습관을 들이다 보면, 글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 수업이니만큼 강사는 글쓰기 강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교육의 목적을 수강생들에게 들려주었다.

“약 2주 정도 글 쓰는 방법을 설명 드리고, 그 다음에 여러분이 직접 글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사는 급하게 달려가기보다는 조금씩 접근하는 모습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강의시간 내내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노트에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교육이 한참 진행된 뒤에 강의실로 들어오는 수강생도 있었는데, 그는 일터에서 막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멀고 고된 길을 달려왔을까. 유난히 축 처지고 굽은 그들의 어깨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강의실에는 그들의 진지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기자는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할까 저어하며 숨소리도 참는다.

잠깐의 만남으로 쉽게 마음을 연 걸까? 옆자리에 앉아 잠깐 강의를 들었을 뿐인데 강의가 끝나자 먼저 기자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낯가림이 심할 거라고 예상했기에 뜻하지 않게 기자의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을 만나자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동네에서 늘 봐왔던 형 같고 아우 같은 그런 얼굴들이었다.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한 수강생은 “낮에는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고, 저녁에 교육을 받으려니 힘이 들지만, 그렇다고 교육조차 안 받으면 미래가 없을 것 같아 꼭 참석합니다”라고 말했다. 과거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한순간에 노숙자로 전락하여 가족과 헤어져 살아온 지가 올해로 3년째라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인문학 교육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이번 교육은 글쓰기 교육이라고 하니, 열심히 공부해서 연락 못하고 사는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편지라도 쓰렵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편지들은 가족에게 차마 보내지 못하고 호주머니 속에 간직할 뿐이기에 흘리는 눈물인가 보다.

“거리에 있는 노숙인을 대상으로 상담보호사들이 매일 밤 설득하여 노숙인 쉼터로 안내합니다.” 김용운 복지국 주임의 설명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노숙인을 39개 쉼터로 인도하여, 거기서 잠을 청하고, 일정 부분 식사도 하고, 자신에게 맞는 당장의 일자리도 찾고, 나아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인문학 교육도 제공하고 있지만, 우선은 그들이 쉼터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단 강의실에 입장하여 교육을 받는 정도까지 발전된 분들은 눈빛부터가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보현의 집' 앞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강의를 하고 돌아갈 때면 제가 이분들에게 오히려 배우고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숙인들이 우리 사회의 낙오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들도 열심히 살아가다가 일시적으로 좌절했을 뿐, 그들을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이석주 교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기자는 좀더 천천히 걷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의 축 처지고 굽은 어깨가 하루 빨리 활짝 펴졌으면 좋겠다고.

시민기자/정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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