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 배 타고 역사 탐방… 이곳이 양화나루요!
발행일 2020.07.28. 16:37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빠트리지 않고 즐겼던 일정 가운데 하나가 한강 유람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강8경 가운데 하나였던 잠두봉에서 건너편에 있는 선유봉으로 향하는 뱃놀이가 대표적이다. 비록 조선시대 풍광은 그림으로나 만날 수 있지만 그 길을 따라가 보는 양화진 근대사 뱃길 탐방이 있다고 해서 함께해보았다.
2015년부터 시작된 ‘양화진 뱃길 탐방’은 올해 ‘이곳이 양화나루요’라는 모토로 진행 중이다. ⓒ이선미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참석자들 모두 열 체크를 하였다. ⓒ이선미
2015년부터 시작된 ‘양화진 뱃길 탐방’은 마포구 생생문화재 사업의 하나로, 절두산 순교성지(A코스) 혹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B코스) 탐방으로 시작해 배를 타고 한강을 유람한다. 이날은 A코스인 절두산 순교성지 탐방으로 시작했다. 원래 잠두봉이었던 곳이 천주교 신자들이 칼로 목이 잘려 죽음을 당한 형장이었던 까닭에 ‘절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은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한국적 요소와 순교정신을 모티프로 지어졌다. ⓒ이선미
1784년 이승훈이 세례를 받으며 시작된 조선천주교회는 1791년 제사 문제로 논란이 커져 박해가 시작된 후 네 번의 대규모 박해를 겪게 되었다. 그 가운데 고종 3년 1866년의 박해가 가장 참혹했다. 천주교 신자 8천 명이 순교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프랑스인 선교사 9명도 있었다. 이에 항의하며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해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원군은 더욱 쇄국의 길을 걸었다. 조선 개국과 근대화는 더 요원해지고 말았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년)를 겪은 후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선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인데,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척화비를 세웠다.
절두산 한복판에는 우리나라 첫 천주교 신부였던 성 김대건 상이 서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외국에서 사제 교육을 받아 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가 능통한 김대건의 능력을 귀히 여겨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배교를 강권했다. 하지만 그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어렵게 사제가 된 지 일 년, 그는 스물여섯 나이였다. 푸르디푸른 청춘에 신념을 지키느라 목숨을 버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 상 앞에서 절두산과 천주교 박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이선미
절두산에서는 천주교가 걸어온 힘겨운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처형장에서 죽은 신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주었던 박순집의 현양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섯 성인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잠시 쉬었다는 바위, 1864년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할 때 대원군과 조선에서 활동 중이던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만나도록 시도했던 남종삼의 흉상 등 곳곳의 자취에서 조선 말 급박했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1997년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으로 사적 399호로 지정되었다.
절두산 성지를 방문한 요한바오로 2세와 마더 데레사 조각상도 만날 수 있다. ⓒ이선미
옛 잠두봉 기슭에 양화나루 표석이 서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나루나 시장에서 대역죄인들을 처형해 경종을 울리곤 했다. 양화나루도 마찬가지였다. 천주교인에 대한 병인박해만이 아니라 을사사화 때는 대윤의 우두머리 윤임을 효수하였고, 갑신정변에 실패해 청으로 피신했다가 시신으로 돌아온 김옥균이 효수되기도 했다.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177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 한 번 열 체크를 하고 배에 올랐다. 원래 6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배에 약 20명 정도가 탔다. 옛 한강변에는 16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마포 지역에만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등 세 곳이 있었다. 이곳을 통해 전국 각지의 곡물과 목재, 생선 등이 들어왔고, 외국인 선교사와 일본인 등도 이 포구를 통해 입국했다.
비록 많은 것이 변했지만 잠두봉의 옛 자취는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다. ⓒ이선미
당시 용산에서 양화진까지 약 5km의 한강변에는 46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양화진은 조선시대 역사서 ‘한경지략’에 “양화진은 경치가 좋아 명나라 사신들이 매일 그곳에서 놀며 시를 지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빼어난 곳이었다. 그들의 유람과 달리 오늘의 한강 탐방은 서울의 근현대사와 만나는 여행이다. 서울의 밤을 밝혔던 당인리발전소를 만나고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밤섬을 만난다.
배 안에서 참석자들이 양화진 뱃길 여정이 그려진 에코백에 색칠을 하고 있다. 가만 보니 엄마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선미
1930년 준공돼 한때는 서울 전력의 70%를 공급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이 화력발전소는 점차 문화시설로 개방될 예정이다. 서강대교 아래 펼쳐지는 초록의 섬은 1968년 여의도를 개발하며 폭파한 밤섬으로 자연의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퇴적물이 쌓여 면적이 더 커지고 무수한 새들이 도래하는 밤섬은 대도시 도심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람사르 습지이기도 하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폭파되었던 밤섬은 놀라운 자연의 힘을 보여주며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사진은 여의도와 밤섬. ⓒ이선미
서울의 변화는 선유정에서도 만날 수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선유봉’은 일제 강점기에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 채석하느라 깎여나가고, 1978년에는 정수시설이 들어섰다가 이제는 그 시설을 이용해 아름다운 생태공원으로 거듭났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유봉을 즐기던 옛 사람들처럼 오늘날은 모든 시민이 선유도공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강변 역사문화 관광코스로는 유일한 ‘양화진 근대사 탐방’은 지난 7월 13일 ‘제8회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서 정부 이벤트 혁신분야 은상을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감염에 대비해 50명에서 15명으로 참여자를 축소하고, 마스크 착용과 열 체크, 소독 등 수칙을 챙기며 진행한 7월 일정이 마무리되고 9월부터 다시 탐방이 이어진다.
양화진 뱃길 탐방 참여를 희망하는 시민은 사업 수행업체인 문화유산활용연구소 ㈜컬처앤로드(02-719-1495)로 신청하면 된다. 탐방은 총 세 시간 정도 이어지며, 참가비는 6,000원이다.
☞마포구 생생문화재사업 카페(https://cafe.naver.com/sangsangyangwha/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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