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킨 따뜻한 손
백인숙 / '03.11월 청계천복원 특례보증 지원 "어머니 이제는 좀 쉬시면서
여생을 즐기세요. 저희들이 있잖아요." 이 얼마나 듣기 좋고, 또 듣고 싶은 소리인가…. 하지만 이 소리가
과연 나에게 합당하기나 한 소리인가? 정말 이제는 좀 쉬어도 될까? 여생을 즐길만한 여유는 있는 걸까?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 믿고 맡길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5년 전인가 보다. 하던 일을 접고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앞길이 막막하던 차에 남편의 제의로 동화상가에 자그마한 구슬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매장에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구슬들을 진열해놓고, 우리 내외는 이제 어떻게 해 나가야 하나 전전긍긍하였다.
그나마 우리 시숙님께서 외상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자금 걱정은 다소 덜 수 있었다. 맨주먹 하나뿐이었던
결혼 초기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기에 그 은혜를 꼭 갚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나는 머리를 짜내 'in bead(인비드)'란 상호를 지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처럼 열심히 구슬을 꿰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서투른 컴퓨터도 열심히 익혀서
여기저기 사이트를 방문하여 정보를 얻고 인비드를 소개하였다. 내 사랑과 정열을 온통 인비드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때마침 하늘의 도우심이 있었던 걸까. 전국에 비즈 공예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옆 가게 주인들이
복도에 나와 구경할 정도로 좁은 매장은 많은 고객들로 북적거렸다.
남들은 이른바 돈벼락을 맞은 거라고 했다. 그래도 역시 벼락이라는 것은 마냥 좋은
것이 못되나 보다. 늘어나는 비즈의 종류와 물량 때문에 확장일로를 걷다 보니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니, 사실 어느 정도는 예측했던 복병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3평짜리 점포 한 칸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장사가 잘 되어 같은 주인 소유의 점포 한 칸을 더 얻었다. 그리고 다른 점포를 또 얻게
되었는데, 이 무렵 월세만 600백만 원 가까이 되었다. 그리하여 손바닥만 하던 매장은 마당으로, 마당에서
운동장 크기로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한 점포주는 임대료를 턱없이
올리겠다고 하였고, 다른 점포주는 아예 가게를 팔겠다고 내놓은 것이다. ‘어떡하나. 엄청나게 올라버린
가격인데 살 돈도 없고….’ 난 너무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점점 경기도 죽어가고 있는데
덩치는 엄청나게 커져 있으니 쉽게 처분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목 디스크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난 갑상선 질환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 탓에 힘든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아픈 남편 앞에서 힘든 내색도 하지 못했다. 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해버리는 성격 탓에, 이 시기 나의 억척스러움은 더 심해져 간 것 같다. 남들은 우리가 떼돈을 번
줄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번 돈은 온통 가게 확장하는데 다 들어가 버리고, 점포주들은 임대료를 더
올리지 못하겠거든 비우라고 하고…. ‘어떻게 일군 사업인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이렇게
홀로 끙끙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난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그러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우선 점포를 매입해보려 했다. 이 상태라면 대출을 받더라도 충분히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가게가 잘 되어 동화상가가 덩달아 활성화되면서 권리금은 무려
2억까지 올라갔다. 처음 지불했던 권리금의 몇 배나 되는 액수….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난 월세를 올려주지도, 점포를 사지도, 그렇다고 새로운 가게를 얻어 나가지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면초가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회로 나는 필요한 자금을 융통할 수 있게 되었다. 농협으로 일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본 포스터 한 장을
통해,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과 관련해 자금을 대출해준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당장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괜한 빚을 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였지만,
결국 자금을 신청하여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신용 하나로, 거기다 저금리로 자금을 사용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렇게 주저앉고만 싶던 때 신용보증재단이 오랜 친구처럼 다가와 따뜻하게 손잡아 준
것이다.
자금을 지원받은 우리 가족은 새 힘을 얻었다. 목이 말라 허덕거리던 중 시원한
냉수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우린 새 계획을 세우고 정들었던 매장을 정리했다. 매장을 정리하게
되기까지 많은 갈등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크게 고민하진 않았다. 세계는 넓고 팔 곳은 많았다. 나의 아들들이
합세하여 인비드를 인터넷 쇼핑몰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제 우리에겐 쫓겨날 걱정 없는 무한대의 매장이 생겼다.
이 때에도 정말 많은 시행착오와 말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있었다. 특히 이제 막
시집 온 며늘아기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온다. 그래도 다행히 일이 잘 풀려 지원받은
자금도 조기에 상환하고, 나는 아들들에게 사업을 맡겼다. 그렇게도 악착같이 매달렸던 생활전선에서 홀연히
털고 뒤로 물러나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이렇듯 한가로운 촌락에서 벽난로에 불을 지피며 음악 감상이나 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던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함께 긴장하며 종종걸음 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라, 가끔
이게 잘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난 ‘그래, 여유란 생각하기 나름이야. 나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도
이렇게 살 수 있으니 말이야.’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또한 고맙게도 나의 아들들은 말한다. “어머니는
그럴 자격 있으세요.”라고….
그래, 고맙다.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너희들이 그렇게 말해주니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너희들만 믿으마. 대신 내가 농약 안 뿌린 배추로 김장도 해 보내고, 토종 매실도 따서 주스도
해 보내고, 새 봄엔 두 주먹 불끈 쥐고 올라오는 햇고사리 따서 택배로 보내주마. 칠십 리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꽃길을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산으로 들로 쫓아다니는 내 꼴을 보면 쉬시라고 보내드렸더니 그 모습이 뭐냐고
너희들은 기겁을 하겠지만, 그래도 나에겐 이게 최고의 휴식이다. 나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단다. 나의
남은 날들이 다른 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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