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를 닮고싶은 여심’

내손안에서울

발행일 2003.10.24. 00:00

수정일 2003.10.24. 00:00

조회 1,986


“달빛아래 억새밭을 거닐어보세요” 월드컵공원내 하늘공원에서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억새꽃이 장관을 이룬다. 쓰레기 매립장에서 환경생태공원으로 복원된 이 곳은 서울에서 억새를 구경할 수 있는 새로운 명소로 떠올라 시민들의 나들이길을 즐겁게 하고 있다.
이즈음 열리는 ‘억새축제’ 중 억새수기 공모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참가하였는데 최우수상의 영예는 서초구 잠원동에 사는 고예곤 씨에게 돌아갔다.
심사를 맡은 박주태 교수는 “억새축제의 풍경을 진실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냈으며, 바쁜 일상을 억새를 보며 잊은 아름다움을 글로 잘 표현했다”고 평했다. 고예곤 씨의 작품 ‘억새를 닮고싶은 여심’을 전재한다.


억새를 닮고싶은 여심



2003년 7월


“하늘공원?”
“뭐 하늘에 있는 공원이란 말인가?”
“월드컵 경기장 옆의 쓰레기더미 위에 조성된 공원인데 야생화 천국이고 경치가 끝내준다던데”
“그럼 우리도 한번 가볼까?”
이런저런 대화 끝에 우리 자전거 동호인 다섯 명은 말로만 듣던 하늘공원에 오르게 되었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을 한바퀴 돌아 자전거 길을 따라 하늘공원에 올라 시원스레 펼쳐진 초록의 향연에 듬뿍 취할 수 있었다. 공원을 한바퀴 돌아보는 도중 길가에 피어있는 알록달록 예쁜 꽃들이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사방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수려한 도봉산의 자태와 도도히 흘러내리는 한강 물과 우뚝 솟은 빌딩 숲 등을 바라보며 빼어난 수도 서울의 자연 경관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무더운 여름 날씨에 옷자락이 날릴 정도의 시원한 바람까지 보너스로 주어졌으니 처음 오르는 우리 일행의 넋을 뺐기에 충분했다.

2003년 10월4일

토요일의 이른 아침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하늘공원으로 향했다.
지난 7월의 사전답사를 자랑삼아 내가 앞장을 서서 달렸다.
공원에 오르는 순간
“ 이건 또 뭐야?”
지난번 여름에는 분명 없었는데 웬 갈대밭 아니 억새동산?
그때는 분명 푸른 초원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변했지?
눈이 휘둥그레지고 내가 분명 딴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이라서 떠오르는 햇살에 반사되는 억새꽃의 흔들림과 갖가지 야생화의 어우러짐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동산의 한 가운데 서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창현 엄마 지금 뭐해. 난 여기 상암동 하늘공원에 와 있어. 경치가 기막 히게 좋아서 나만 보기 아까워. 지하철 타고 지금 빨리 와“
“지금은 바빠서 안되겠으니 다음 화요일에 우리 조직원(같은 시기에 교직에서 퇴직한 사람들 모임의 애칭)들과 함께 꼭 가자. 내가 연락 다 해 놓을 테니까”

2003년 10월7일

아줌마 일행은 오전에 여성대학 강의를 듣고 간단히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6호선 지하철을 타고 월드컵공원 역에 내리면서부터 감탄사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경기장 규모가 이렇게 큰 줄 몰랐었네.”
“공원 올라가는 계단이 나무로 되어있고 경사도 원만해서 오르기도 참 편 하네”
난 내가 올라오는 자전거 길도 자랑삼아 가르쳐주며 가파른 능선 길을 따라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아줌마들의 함성이 또 시작이다.
“야! 갈대밭이다.”
“웬 갈대가 이렇게 많을까?”
“이쪽은 갈대고 저쪽은 억샌가?”
“난 이렇게 키가 크고 싱싱한 억새는 처음 본다”
“나도“
“나두야”
“어머, 여긴 또 어디야? 야생화 동산이잖아!”
“어머머, 작년에 가 본 오스트리아보다 더 멋지다!”
“이건 완전히 외국 풍경이잖아?”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아줌마 일행은 억새군락과 야생화동산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어린애 마냥 즐거워했다.
억새와 갈대는 사는 곳도 생김새도 다르다는 것과 하늘 공원에 있는 것은 모두 억새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멀리서 볼 때 바람개비처럼 보이던 것도 공원 안에서 보니 무척 규모가 크고 높았다.
“저건 뭘까?”
“풍력 발전기 같기도 하도 풍향계 같기도 하네.”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속단을 내린 후에 가까이 가서 설명서를 읽고는 또 한번 놀랐다.
말로만 듣던 풍력 발전기가 바로 그것이며 그 길고 좁다란 날개에서 일으킨 전기로 하늘공원 내에서 필요한 전력을 충당하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 공원의 억새 꽂은 해질녁의 노을과 함께 보아야 그 정취가 한층 더 고조된다는 설명과 함께 10일부터 19일까지 억새축제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다음주에 한번 더 시간을 내서 저녁 무렵에 찾아오자는 다짐들을 하고 공원을 내려왔다.

2003년 10월 11일

가족들의 이른 출근과 등교준비가 끝난 시간, 난 설거지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려 하늘공원에 도착했다.
지난 주말에 본 아침 햇살에 비친 하얀 억새꽃의 흔들림과 싱그러운 억새 잎의 사각거림이 눈앞에 어른거려 친구들과 같이 오기로 한 며칠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단장 된 한적한 자전거 길을 오르는 내 자신이 더없이 행복하기만 하다.
헉헉거리며 공원 안에 들어서니 마치 니스 칠 이라도 한 듯 윤기 흐르는 억새 잎이 바람에 부딪치며 ‘사르륵’ ‘사르륵’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하얀 억새꽃은 군무를 추 듯 단체로 흔들리며 나를 맞이하는 게 아닌가!
축제가 시작 됐어도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난 억새 밭 사이를 이리저리 숨바꼭질하듯 거닐기도 하고 이름도 모르는 풀꽃들이 자태를 뽐내는 사이사이를 걸으며 시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자기 키보다도 훌쩍 큰 꽃무더기를 감싸고 있으면서도 흔들리기는 할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억새의 모습이 너무도 당당하게 느껴진다.
가을 햇살 아래 하얀 광채를 뿜으며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저 억새꽃 모습처럼 나도 깨끗하고 기품 있고 당당한 노년을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가을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곳의 많은 억새가 자생한 것이 아니고 한 포기 한 포기 손으로 심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 자연의 창조주께 이 공원의 조성을 위해 애쓴 사람들의 손길 위에 축복을 더 해 달라는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군데군데 내 걸린 휘장에 ‘ 억새밭 밤길 걷기’ 라고 쓰여진 문구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얀 억새꽃 바다위로 떨어지는 홍시감보다 더 빨간 저녁 해를 바라보는 정경과 가을 달빛아래 하얗게 출렁이는 억새꽃의 풍광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공원을 내려오면서 마치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과 작별이라도 하듯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며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하는 나는 어느새 하늘공원의 매니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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