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사 ‘백범일지 낭독회’에 가다

시민기자 이재찬

발행일 2017.11.24. 11:25

수정일 2017.11.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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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낭독회 행사를 진행하는 시민위원과 스님의 모습 ⓒ이재찬

백범일지 낭독회 행사를 진행하는 시민위원과 스님의 모습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지난 11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많은 시민위원과 사참 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 기념과 백범일지 낭독회 행사를 가졌다.

이날 강연을 맡았던 한시준 교수는 백범 김구 선생이야말로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동아시아의 한‧중‧일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 중에서 중국은 공자, 진시황, 손문, 장개석, 모택동을,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은 세종대왕, 이황, 이이, 신사임당, 이순신 등을 거명하였다.

그런데 ‘세계에 알려진 한국인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우리의 역사를 세계에 알려야 할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공감했다. 이를 위해, 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는 응당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평등·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세계인이 공감할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통한(痛恨)의 독립운동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세계적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을 찾는다면 누구인가? 국내외적으로 가장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인물은 백범 김구 선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중국, 대만을 비롯해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중국과 대만에는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처럼 주목받고 있다. 중국 국민당과의 한‧중 대일 공동항전의 지도자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기념관이 없지만, 중국 상해, 항조우, 충칭 등 9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들이 세워져 있다. 또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 차원이 다르다. 중국 정부나 중국인들은 상해의 임시정부 청사를 대한민국의 탄생지로 여기고 있고 한국에서도 그렇게 여기는 줄로 알고 있다고 한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김구 선생을 이해하는 차원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김구 선생을 ‘독립운동 원훈(元勳)’, 또는 ‘한국국부(韓國國父)’라고 일컫기도 한다. 김구 선생은 이미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구 선생의 자서전이 영어‧중국어‧일본어‧독일어‧러시아어‧몽골어 등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것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다.

김구 선생은 궁극적으로 자주독립과 함께 세계평화를 지향했다. 그의 ‘나의 소원’에서 밝힌 목표는 ‘자주독립국가’, ‘자유국가’, ‘문화국가’ 건설이었다. 김구는 세계평화에 대해 꿈과 실현방안을 제시한 지도자였다.

당시 일제를 상대로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김구도 이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바위는 부서졌다.

김구 선생이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세계평화도 마찬가지다. “어느 민족도 해본 일이 없으니 공상이라고 하겠지만, 우리 민족이 나서서 해보자”고 말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상가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세계평화를 목표로 삼고 그 방안을 제시한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낭독회가 열린 봉원사를 탐방하는 시민들  ⓒ이재찬

낭독회가 열린 봉원사를 탐방하는 시민들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담아낸 백범일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들의 횡포를 경험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였다. 국권침탈로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자를 구(九)로 바꾸고, 백정, 범부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백범(白凡)이라는 호를 썼다.

3.1운동 후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원했고, 광복군 창설 등 항일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을 기념해 열린 백범일지 낭독회 행사를 가진 봉원사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다. 1899년 일본 장교 살해사건으로 투옥 중 탈옥하고 피신한 장소이며, 사형(師兄) 혜정(慧定) 스님과 동행해 평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해후하기도 한 장소이기도 하다.

김구 선생이 1928년부터 쓰기 시작한 백범일지는 일제 침략이 심각해지고, 독립의 희망이 점차 약해지면서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 형식으로 집필한 것이다.

백범일지는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담아냈는데 상권과 하권, ‘나의 소원’으로 나뉘어 구성돼 있다. 상권은 1929년, 아들들에게 편지로 전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구한말 당시의 과거사로 ‘우리 집과 내 어린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으로 구성했다. 하권은 그의 독립운동 기록으로 ‘3‧1 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으로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 ‘정치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구성했다.

상권은 상하이 임시 정부 청사에서, 하권은 1942년에 충칭시에서 각각 쓰였고 상•하권과 ‘나의 소원’을 합친 판본이 1947년 12월 국사원(國士院)에서 출간됐다. 이후 김구 선생은 1948년 이번 낭독회가 열린 봉원사를 다시 방문했다. 백범일지는 현재 백범기념관에서 소장중이다. 백범일지는 1997년 6월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됐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에 돌아온 그는 남북분단을 우려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힘쓰다가 1949년 6월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경교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구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독립을 쟁취하고자 함과 동시에 진실하고 인간적인 사랑과 자비를 몸소 실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정치꾼들의 음모에 의해 운명했을 때는 백만의 인파가 장례행렬에 따랐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하고 있다. 이번 낭독회를 통해 다시 한번 김구 선생이 진정 이 나라의 영원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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