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 길 따라 '100년의 시간여행'

시민기자 최용수

발행일 2017.07.24. 13:35

수정일 2019.02.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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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탑골공원 정문에는 `삼일문`이라는 명판이 붙어있다. ⓒ최용수

3.1운동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탑골공원 정문에는 `삼일문`이라는 명판이 붙어있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지난 15일 오후 종로구 수송공원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1919년 3·1운동 ‘선언서(宣言書)’가 어떻게 작성, 인쇄, 운반, 낭독되어 전국적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는지, 그 날 이동 경로를 답사하는 ‘선언서의 길’ 행사였다.

오는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서울시는 3.1운동 정신이 우리 삶과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가 될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하는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100년’ 행사를 기획했다. ‘선언서의 길’ 행사도 그 중 하나이다.

보성사 사장 이정일 동상 앞에서 답사단은 잠시 묵념 시간을 가졌다. ⓒ최용수

보성사 사장 이정일 동상 앞에서 답사단은 잠시 묵념 시간을 가졌다.

은죽(銀竹)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시민위원 310’ 50여 명이 종로구 수송공원에 모였다. 100년 답사 첫 번째 길, 3·1 독립 ‘선언서의 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답사행사는 3·1운동 100주년 서울기념사업 총감독 서해성 교수 설명과 함께 3시부터 2시간여 동안 보성사 터 ~ 태화관 옛터 ~ 탑골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진행됐다.

첫 번째 장소는 조계사 후문 골목 건너편 수송공원에 있는 보성사 터이다. 공원 규모는 작았지만 3·1 독립운동 역사적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넉넉한 공원도 드물다. 보성사(普成社)는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였다. 보성사 소유주 손병희(천도교 교주)의 특명으로 최남선이 초안을 쓰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선언서를 넘겨받은 보성사 이종일 사장은 1919년 2월 27일 밤 3만5,000매를 인쇄한다. 운반 중 일본 측 형사에게 발각되는 위기도 있었으나 족보 책이라 위장하여 위기를 넘긴다. 또 3월 1일에는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 부도 발행한다. 이에 일경(日警)은 보성사를 폐쇄하고, 급기야 6월 28일 밤 불을 질러 태워버린다. 보성사 터에는 6.35m 높이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라는 조형물만이 남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태극문양 형태를 취하여 민족 얼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숙명여학교와 신흥대학 터를 알리는 표석(좌), 수송공원 서쪽에 위치한 목은 선생 영당(우) ⓒ최용수

숙명여학교와 신흥대학 터를 알리는 표석(좌), 수송공원 서쪽에 위치한 목은 선생 영당(우)

이 외에도 수송공원에는 독립운동을 대내외에 알린 <대한매일신보> 터,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 후신인 신흥대학교 터가 있다.

또한 독립선언 기념비, 근대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중동학교와 숙명여학교 등 7개 학교 터와 보성사 사장 이정일 선생 동상이 있다. 답사단은 폭우 속에서도 이정일 동상 앞에서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공원 길 건너에는 조계사가, 서쪽에는 보물 제125호인 이색영정이 모셔진 목은 선생 영당이 자리하고 있는 등 유서 깊은 도심 공원이다.

태화관의 옛터인 태화빌딩 입구에 `삼일 독립운동유적지`라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최용수

태화관의 옛터인 태화빌딩 입구에 `삼일 독립운동유적지`라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답사단 다음 코스는 인사동 태화관 옛터다. 3월 1일 오후 2시, 한용운이 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민족대표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던 곳이다. 최초 선언장소로 계획했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긴 것은 흥분한 학생·시민과 일경 충돌을 우려한 재경 민족대표들의 결정 때문이란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 원칙을 세운 독립운동, 그런데도 7,500명 사망, 부상자 1만5,800명, 구속자 4만6,300여 명 등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태화관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있다. 입구에 ‘삼일 독립운동유적지’라는 표석이 있다.

태화빌딩 로비에는 `민족대표 삼일운동 선언도`가 걸려 있다. ⓒ최용수

태화빌딩 로비에는 `민족대표 삼일운동 선언도`가 걸려 있다.

1층 로비 벽면에는 ‘민족대표 삼일운동 선언도’가 걸려있다. 답사단은 선언도 아래에 둘러앉아 잠시나마 그 날 민족대표가 되어보았다.

답사 마지막 장소는 종로2가 탑골(파고다)공원이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던 바로 그 시각 3월 1일 오후 2시, 경신고 학생 정재용이 공원 중앙의 팔각정에 오른다.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쳐 들고 공원에 모인 5,000여 명 학생과 시민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한다. 그리고 독립 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3·1 독립선언서> 원 제목은 그냥 ‘선언서’였지만, 정재용은 조선독립이란 네 글자를 앞에 붙여 <조선독립선언서>라며 낭독했다. 이때부터 <3·1 독립선언서(문)>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이후 3·1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총 1,542회 220만 명의 시위 참가라는 세계 혁명사 큰 기록을 남긴다. 이를 기념하듯 탑골공원 정문에는 ‘삼일문’이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탑골공원 외곽에는 3.1독립운동 모습이 조각된 조형물이 줄지어 설치되어 있다. ⓒ최용수

탑골공원 외곽에는 3.1독립운동 모습이 조각된 조형물이 줄지어 설치되어 있다.

이번 행사는 (예비) 시민위원 310의 ‘100년 답사’ 첫 번째 행사였다. 다가오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100년을 향하여, 3·1운동 당시 ‘선언서’가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을 100년 만에 시민들이 처음으로 걸었다. 은죽(銀竹) 같은 장맛비 속에서도 답사를 강행한 것은 시민들이 직접 걸어서 잊혀진 3·1 독립 ‘선언서(宣言書)의 길’을 되찾고자 함이다.

앞으로 서울시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까지 ‘C-47기 활용한 독립운동교육 프로그램 운영,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재현, 안국역 항일 독립운동 테마역사로 재탄생, 100주년 기념 대표 거리 조성, 서울시민 독립군 학교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다. 그러나 숭고한 3·1운동 의미를 오롯이 되찾는 일은 시민들 몫이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위원 310’의 100년 답사 첫 번째 길인 3·1 독립 ‘선언서의 길’은 비록 짧은 시간 여행이었지만, 1919년 3월 그날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안내
○ 문의 : 홈페이지(www.seoul100.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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