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교수에게 묻다, 헬조선 탈출법은?
시민기자 박희영
발행일 2017.01.02. 15:37
외환위기 이후 20여 년. 1인당 연평균 소득 증가율 6%에 육박하는 고도성장을 이뤘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는 한국 국민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국회가 개헌특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하면서 한국 정치는 전환의 기회를 맞았다. 정치만이 아니다. 경제 역시 새로운 전환의 길을 모색할 시점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전국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초청으로 서대문구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펼친 ‘더불어 함께, 대한민국 경제’ 강연에 다녀왔다.
장하준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의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맹점을 날카롭게 파헤쳐 주목받고 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한국이 ‘헬조선’인 이유
장 교수는 소득 중심의 복지 측정은 한계가 있다는 주장으로 말문을 열었다. 쉽게 말해, 현대 주류 경제학에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반면, 평균적으로 전체 노동의 30%를 차지하는 가사노동은 국민소득 계산에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니, 소득 중심 복지 측정은 실제 삶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장 교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부의 축적 과정의 도덕성이다.
“문제는 고도성장한 효과가 워낙 크다 보니까, 이게 하나의 ‘신화’가 돼버린 거예요. 소득만 높으면 된다. 경제성장만 빨리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소득’이란 개념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치가 있다고 봐요. 국민소득 2만 달러라고 할 때, 교육에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만들어서 돈을 벌었는지, 불량식품을 많이 만들어서 돈을 벌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경제학에서 시장은 일단 옳다고 보기 때문이죠.”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는 ‘선진국 척도’로 통용돼 왔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7,940달러(2015년 기준). 2018년 3만 달러에 오를 전망이다. 장 교수는 이 또한 ‘평균’일 뿐, 국민 전체 생활 수준의 실상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꼬집는다. 따라서 소득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노동’과 ‘공정성’이라는 요소를 꺼내 든다.
노동문제 무시는 인생 절반 무시하는 것
장 교수는 “경제학계를 지배해온 신고전파는 소비를 통한 효용 극대화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보지만 노동은 ‘필요악’이라고 보고 거의 무시해왔다”고 짚어준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는 노동과정에서 형성된다”는 게 장 교수의 시각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선진국 가운데 싱가포르 다음으로 일을 많이 한다”며 “노동문제를 무시한다면 우리 인생의 절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에 따르면 노동은 신체적 복지, 지적 복지, 심리적 복지 등에 영향을 미친다. 장 교수는 “노동시간이 길면 장기적으로 건강에 해롭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나사만 조이면 사람이 미쳐버리며, 고용불안은 심리적 스트레스로 연결된다”고 풀어낸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노동시장 규제를 완화해 고용불안이 커졌다.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22.4%(2013년 기준)로 OECD 4위이며, 평균(11.8%)의 약 두 배에 달할 만큼 높다. 장 교수는 “정규직도 조기 퇴직 관행이 생겨 과거보다 고용불안이 심해졌고, 자영업자도 자기 착취를 통해 근근이 살아가는 생계형이 3분의 1을 차지하기 때문에 고용불안에 해당한다”면서 사실상 ‘전 국민의 고용불안’을 우리 사회 특징으로 꼽는다. 국민소득 수준에 비해 노동시간, 고용안정 등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지적이다.
기회 균등하다고 공정한 사회일까?
‘사회가 얼마나 공정한가’도 국민 행복과 직결된다. 장 교수는 “사회 구성원이 사회 질서가 공정하다고 믿어야 행복할 수 있는데, 과연 공정한 사회가 무엇이냐는 점에 논쟁이 있다”며 기회만 균등하게 주면 공정한 사회로 보는 시장주의 경제학자들 주장에 물음표를 단다.
그는 “기회 균등 사회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실제로 기회 균등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미국 명문대의 ‘동문자녀 특혜 입학제도’를 비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날을 세운다. “체육 경기에서 공정한 경쟁을 담보하려면 선수들의 기본 바탕이 비슷한 토대 위에 놓여야 하므로 체중, 성별 등으로 나눠 불공정 경쟁 조건을 구조적으로 없앤다”며 “실제 인생에서도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려면 기회 균등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결과의 균등도 보장하는 장치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3살 때까지는 영양 상태가 두뇌발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그때 잘 먹지 못하기 때문에 지능이 낮습니다.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공부 못한다고 깔보는데, 그 아이의 죄는 아니잖아요. 부모가 아이에게 최소한의 영양, 의류, 교육, 환경을 제공해줄 수 있는 소득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그 사회는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 없어요. 복지가 잘 돼 있는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부모 소득수준과 자식 소득수준의 상관관계가 20% 정도밖에 안 되는데,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는 80%에요.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부의 재분배 실패한 한국 자살률 OECD 1위
결과의 평등을 이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복지 확대를 통한 소득 재분배와 시장 규제를 통한 경제적 약자의 보호다. 장 교수는 “한국은 중소기업 보호 고유 업종 지정 등으로 대기업을 제약하는 선별적 보호 방식을 써서 시장 자체를 규제했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다”면서도 이 방식이 갖는 구조적 문제를 찾아낸다.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국민을 진정으로 공정하게 대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농, 소상인, 중소기업, 자영업자 중심으로 보호가 집중돼 실업자나 노인 등은 경제적 약자인데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한국은 2008년에서 2012년 평균 국민소득 대비 복지지출이 9.3%로 OECD 국가(평균 21.7%) 중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소득 재분배가 매우 취약하다는 증거다. 장 교수는 “재분배가 0에 가깝기 때문에 불평등도가 평균 이상으로 높다”며 “한국이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것은 재분배가 안 되는 과거 시스템이 완전히 한계에 봉착했다는 증거”라고 짚는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까지 자살률이 OECD 평균 이하였는데 20년 사이 치솟은 것”이라며 “지금 한국 자살률은 OECD 평균치의 3배, 노인자살률은 OECD 평균치의 4배에 이른다”고 심각성을 깨우친다.
장 교수는 “복지와 성장이 상충관계라는 주장은 실증적 근거가 없다”고 부정적 견해를 밝힌다. “미국도 1940~50년대 트루먼,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최고 소득세율이 92%였고 1980년대 들어와 레이건 대통령이 40%로 내렸다”며 “세금이 계속 내려갔는데, 미국의 투자율과 성장률도 계속 떨어졌다”고 파헤친다.
“미국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이 1.5배가량 높은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성장률이 더 높다”는 사례를 들려준다. 그는 “미국 같은 경우 국민의료보험도 없고 다 직장 의료보험이다 보니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목숨 걸고 저항하지만, 실업수당과 직업재교육이 제공되는 복지국가에서는 해고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적다”며 “복지는 신속한 구조조정을 가능하게 해 오히려 성장을 돕는다”는 논리를 편다.
복지는 ‘무상혜택’ 아닌 ‘공동구매’
행복 증진을 추구하는 복지국가로 방향을 틀기 위해 가장 어렵지만, 꼭 필요한 것은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다. 장 교수는 “사회복지를 자꾸 ‘무상복지’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라며 “가난한 사람도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를 낸다”고 ‘무상’이란 개념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그는 “복지는 공동구매”라며 “의료보험, 실업보험, 노후보험 등 사회보험을 모두 구매하려면 비싼데, 5,000만 명이 공동으로 구매해서 할인받는 식”이라고 풀어준다.
가난한 사람만 도와주는 ‘선별복지’에 대해서는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며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세금만 내고 혜택은 없어 불만이 생기고,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사회적 낙인이 찍혀 이등 시민 취급을 받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장 교수가 강조하는 방법은 ‘보편복지’다. “선별적 복지는 소득 수준 등 조건을 따져야 하기 때문에 운영비용이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제도”라며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가 진정한 사회복지이고,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민연금, 삼성 합병 편든 것 잘못
강연 2부에서는 이명묵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대표, 정용건 사회연대네트워크 상임대표, 정승일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이사, 김영배 서울 성북구청장, 민형배 광주 광산구청장이 패널로 참여했다.
국민연금의 삼성 합병 찬성은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2부 행사 토론에서는 이 부분을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장하준 교수는 정용건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대표가 질문한 정규직-비정규직 임금격차 완화에 대한 대안을 밝히는 과정에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 보인 국민연금의 행태에 대해 입을 열었다. “국민연금이 삼성 편을 들어준 게 특혜라는 논쟁이 있는데,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 ‘산업재해 노동자 보상’, ‘노조 인정’ 등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경영하라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국민연금이 마치 외국 펀드랑 똑같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국민연금의 행태를 꼬집었다.
장 교수는 “삼성을 엘리엇 같은 외국 펀드에 넘겨줄 것이냐, 작은 지분으로 전횡하는 세습가족에 물려줄 것이냐는 질문은 쥐약 먹고 죽을래, 농약 먹고 죽을래 라고 물어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유하며 애국심 차원에 머물고 마는 논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들려준다. “기업의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 커지면 사회적 존재가 되기 때문에 특별관리를 받아 마땅하다”고 사회적 중요성에 방점을 찍는다.
‘주주자본주의’, 국민경제에 도움 안 돼
장 교수는 “독일은 ‘공동결정제’라는 제도가 있다”며 “500인 이상 되는 기업에 경영이사회 외에도 노동자 측과 경영자 측이 반반인 감독이사회가 있어 기업 인수 합병, 공장 폐쇄, 구조조정 등 중요한 사안의 결정권을 갖는다”고 알려준다.
독일만이 아니다. 이상적인 복지국가의 하나로 꼽히는 스웨덴을 보자. 장 교수는 “스웨덴 최대 발렌베리 그룹은 재산을 공공재단화해 매출의 최대 85%를 스웨덴 사회에 투자한다”고 덧붙인다. 이와 관련해 이날 진행을 맡은 정승일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이사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제안한 ‘근로자이사제’가 독일의 공동결정제와 같은 개념”이라고 풀어준다.
장 교수는 “기업이 주주자본주의로 가는 것을 막고, 복지국가를 확대해 주식시장 규제와 노동 규제 강화 등 다면적으로 접근을 통해 정규직-비정규직 임금격차 해소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답을 내놨다.
이어 “재벌 개혁안으로 소액주주 권한을 강화해 적은 지분으로 횡포를 부리는 재벌가를 견제하자는데, 그 주주들은 외국인이나 부자가 많아 우리나라 일반 국민의 삶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라며 재벌에 대한 실질적 규제가 이뤄지지 못한다고 ‘주주자본주의’의 허점을 짚는다.
장 교수는 “영국 노동당 대표 제레미 코빈이 핵심지지층에게는 높은 지지율을 얻는데도 판을 뒤집지 못하는 이유는 보수당 정책과 같은 틀에 머물며 돈 좀 더 준다고 하는 것일 뿐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한두 푼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 국민경제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성”을 부각했다.
정경유착과 국가개입은 별개의 이야기
장 교수는 “우리나라는 불행한 독재정치 역사 때문에 관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독재 청산과 등치 개념으로 인식되는 오해가 있다”며 “재벌에게 특혜를 주는 관치가 잘못된 것일 뿐 국가 개입을 통해 통화정책, 재정정책, 무역정책, 노동정책 4개 분야를 적절히 조율하는 것은 필수”라는 대목에 힘을 준다.
장 교수는 중앙은행 독립성 논쟁을 예로 들며 “중앙은행 독립에 반대하면 ‘관치 금융’하자는 것이냐고 비난하는데, ‘언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는 우파가 중앙은행 독립성을 소리 높여 외친다”며 “중앙은행이 객관적인 기술자들의 조직 같지만, 금융권과 가장 교류가 많으므로 독립성을 갖게 되면 정책이 금융권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장 교수의 설명이다.
장 교수는 “중앙은행의 목표 자체가 물가안정에만 할당된 것”도 문제라며 “금융투자자 입장에서는 물가상승률이 높으면 손해이기 때문에 물가 잡기를 원한다”고 덧붙인다. 중앙은행 독립이 자칫 금융권 투자자들과 결탁을 통해 국민경제에 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짚어주는 역설적 반증이다.
확장재정이 다 빚으로 남는 것은 아냐
토론회에서는 패널 외에 시민 방청객 질문도 쏟아졌다. 그 중 김민석(18)씨는 “확장적 재정정책을 펴면 국가부채가 늘어나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 장 교수는 “경기순환 사이클로 볼 때, 정부는 민간경제가 좋을 때 긴축재정을 하고 민간경제가 안 좋으면 확장재정을 편다”며 “확장재정으로 경제가 살아나면 세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정부가 쓴 돈이 다 빚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다”라고 들려줬다.
방청객 한상우(37)씨는 “복지국가로 나아간 선진국은 증세에 대한 국민의 반발을 어떻게 극복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장 교수는 “초기에는 목적세를 도입해 늘어난 세수를 모두 복지에 쓰기로 약속하고 의구심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다”며 “목적세가 유연성이 떨어져 장기적으로는 재정운영을 어렵게 만들지만, 국민의 신뢰를 쌓기 위해 초기에는 운용의 묘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풀어줬다.
행동하는 시민사회가 답
올해 수능을 본 정욱재(18)씨는 “복지국가가 형성되면 사람들이 살기 편할 것 같은데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물었고, 장 교수는 “국민이 복지국가 이야기를 많이 해 공론화해야 정치인들이 관심을 가진다”며 “탄핵도 계속 이야기하니까 가결되지 않느냐”고 시민 행동에 힘을 실었다.
이런 의미에서 방청객 박혜진(32)씨의 반응은 장 교수의 해답과 맥이 닿는다. “복지국가에 대해서 좋다고는 들었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됐는데, 결국 시민 사회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비록 부결됐지만, 2016년 상반기 세계를 달궜던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 역시 시민사회의 정책 발안으로 시작된 것 아닌가. 결국, 복지사회로의 이행 역시 정치권을 견인하는 시민사회의 행동이 답이라는 결론이다.
※ 이 기사는 청년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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