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쪽같이 사라진 크리스마스트리

정석

발행일 2015.12.15. 16:00

수정일 2015.12.29. 13:29

조회 2,110

크리스마스ⓒ뉴시스

정석 교수의 서울 곁으로 (5) 세 개의 크리스마스트리

옛날이야기 하나. 어느 동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크리스마스트리 세 개를 설치하였다. 하나는 새로 지어진 아파트단지 안 보행자전용도로 위에 세웠고, 다른 둘은 아주 오래된 동네 길모퉁이에 두었다. 차들이 들어올 수 없는 보행자전용도로 위에 두었던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품들은 다음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옛 동네 길가에 세워둔 크리스마스트리는 새해 첫날 철거할 때까지 전등과 장식품 하나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보행자전용도로에서는 하루 만에 누군가 트리를 훔쳐갔지만, 차들과 사람들로 붐비던 길모퉁이에서는 누구도 크리스마스트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제인 제이콥스가 1961년 출간했던 책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 소개되었던 실화다. 미국 뉴욕시의 공공주택단지인 워싱턴하우스에서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이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졌던 곳을 한번 상상해보자. 아파트단지 보행자전용도로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니 금방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사람들만 다닐 수 있게 만든 길, 아마도 길가에는 나무들이 늘어서있을지 모른다. 차가 없으니 안전할 수 있겠지만 인적이 끊기면 한적해져 매우 불안한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구나 나무가 우거져 있어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지 않는다면 더욱 위험하게 생각될지 모른다. 밤늦은 시간에는 오가는 사람이 드물 테고 그래서 더 안전하지 않은 곳이 될지 모른다.

옛 동네 길가는 어땠을까? 차가 오가는 도로변에 보도가 있었을 테고 길을 따라 나지막한 건물이 줄지어 서있었을 것이다. 건물 1층은 아마도 대부분 가게였을 것이다. 온갖 물건들을 파는 잡화점도 있을 테고, 빵집이나 카페도 있었을 것이다. 야채나 고기를 파는 가게들도 있어 퇴근길에 저녁거리를 사서 집으로 가는 사람들로 북적댔을지 모른다. 길에 면한 1층은 모두 상점들이지만 2층과 그 위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엄마는 창밖으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보며 크게 이름을 불렀을지 모른다. 엄마만 불렀을까? 가게를 보던 동네아저씨도, 길을 지나던 동네 아주머니도 아이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로 붐비고 잘 아는 얼굴들을 마주하는 곳에 세워둔 크리스마스트리를 누가 감히 손댈 수 있을까?

제인 제이콥스가 전한 뉴욕시의 이야기는 안전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보행자전용도로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볼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시의 눈이 범죄예방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예방을 뜻하는 셉티드(CPTED)의 핵심도, 또 오스카 뉴먼이 강조했던 방어공간(defensible space)도 결국 사람의 눈길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북경에 잠시 살았을 때 내가 살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제복을 갖춰 입은 젊은 친구들이 늘 있었다. 사람이 타면 몇 층 가는지를 물어 버튼을 눌러주곤 했는데 할 일도 참 없어 보여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술이 꽤 취해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이 친구가 날더러 술 많이 마신 것 같다고 씩 웃으며 묻더니 내가 얘기하기도 전에 3층 버튼을 쿡 눌렀다. 술이 번쩍 깼다. 엘리베이터에 근무하는 이 친구들은 단순히 버튼을 눌러주는 게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을 한명한명 다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말하자면 경비원의 역할까지를 담당했던 것이었다.

CCTV가 우리의 안전을 더 잘 지켜줄까? 사람이 더 잘 지켜줄까? 많은 아파트단지에서 경비원의 숫자를 줄이고 CCTV와 카드키로 대체하는 걸 보면서 좀 의아스럽다. 경비아저씨들이 훨씬 더 안전을 잘 지켜줄 텐데 왜 그럴까? 성북구의 석관 두산아파트처럼 아파트 주민들이 에너지 절약운동을 펼쳐 아낀 관리비로 경비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임금을 올려드린 훈훈한 이야기도 있지만, 점점 사람 대신 기계에게 우리의 안전을 맡기는 곳이 느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안전한 마을과 안전한 도시를 만드는 일, 어쩌면 간단한 일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마다 그 길을 지켜보는 감시의 눈길이 늘 머물게 하는 것이다. 가게들이 늦게까지 문을 열고, 사람들이 늘 오간다면 그 길은 안전할 것이다. 핏줄에 피가 막힘없이 돌 듯, 우리 도시의 거리마다 사람들이 늘 오고간다면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다. 큰 핏줄뿐만 아니라 모세혈관까지, 좁은 골목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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