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탁, 던져놓으면 그만인 것을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9.19. 16:38

수정일 2014.09.19. 16:38

조회 1,054

은행(사진 와우서울 포레스트)

성숙한 정신 건강에 필요한 것은
상충되는 필요성들, 목적, 의무, 책임, 방향 등을 융통성 있게 균형을 잡는 능력이다.
이러한 균형 잡는 훈련에서 근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포기'다.

-- 스캇 펙(M. Scott Peck) 《아직도 가야 할 길》 중에서

29번째 부탄의 왕 나왕 남길의 잠언과 반대 되는 말인 것도 같다. 나왕 남길은 어떤 상황에 처할 지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함을 주장했다. 그런데 가만히 톺아보면, 나왕 남길이 '포기하지 말라'는 것과 스캇 펙이 '포기하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상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왕 남길이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절망을 이기는 진정한 힘을 지키라는 뜻이며, 스캇 펙이 '포기하라'는 것은 균형을 위해 버려야 할 삶의 군더더기가 무엇인지 깨달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살기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포기'의 문제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져가야 할 고민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욕망과 욕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그런 한편으로는 갖고 싶고,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그것들 모두를 가질 수 없고,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마냥 좌절, 패배, 상실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소유 관념이 생기기 시작한 3세 전후의 어린아이들을 살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 시기의 아이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탐욕스런 독재자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자기 이름표를 붙이고, 마구잡이로 울고 떼쓰며 소유권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토록 강렬한 쟁투 끝에 모두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이는 자기에게 가능한 욕망을 찾게 된다. 모든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조절하게 된다. 모두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진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타협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그것이 곧 건강한 '포기'의 과정이자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나는 과정이다.

하지만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많은 사람들은 일부를 포기하지 못해 전부를 포기한다. 승부욕을 포기하지 못해 경쟁 없이도 자발적으로 성취하는 즐거움을 잃는다.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해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당당함과 온화함을 잃는다. 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기를 포기하지 못해 천진함과 자연스러움을 잃는다. 그저 탁, 던져놓으면 그만인 것을 그러쥐고 쩔쩔맨다. 움켜쥔 손아귀를 좀처럼 펴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을 포기하게 되면 엄청난 것을 잃고, 그 상실감에 시달리리라는 공포 때문이다. 스캇 펙은 이처럼 포기의 과정에서 장애가 생기면 병적인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는 심지어 포기할 수 있는 기초적인 능력에 충격적인 상처를 받아 생기는 우울증에 '포기 신경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한때 불굴의 의지를 가진 어리석은 완벽주의자였던 경험으로 말하자면, 실로 포기함으로써 보다 많이 얻게 된다. 승부욕과 경쟁심, 자존심과 남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모습을 포기하면서 나는 더 자유롭고 평화로워졌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결국 '두렵다'의 다른 이름일 뿐이므로, 스스로를 가둔 황금 창살을 포기한다는 건 용감한 일이다. 스스로를 져버리면서 마침내 스스로를 넓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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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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